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팟캐김 Aug 01. 2021

한번에 보는 금융의 역사

돈의 출현부터 브레튼우즈 체제 종식까지

 

안녕하세요, 경제유캐스트의 팟캐하는 김기자이자, 요즘 나온 따끈따끈한 책 '금융초보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 톱80'을 썼던 김유성입니다.      



오늘은 책 얘기도 좀 할겸, 5분만에 듣는 금융의 역사로 잡았습니다. 참고로 전 금융업계를 출입하는 기자이지, 전문 애널리스트가 아닙니다~ 저한테 추천 종목을 물어보시는 것은 안되고, 전문적인 주식 정보는 삼프로티비로~      


◇돈의 출현- 물물교환의 편의성↑


예, 원시시대 원시인 사회가 있었습니다. 이 원시인은 수렵채집을 했고요. 자체적으로 조달을 하게 됩니다. 타 부족과의 만남은 곧 전쟁이었던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숲이라는 한정된 곳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등 거의 전부를 얻는데, 그런 한정된 공간 안에서 경쟁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생존의 위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영역이란 게 구분이 됩니다. 전쟁을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교류를 하면서 무언가 교환하는 게 큰 이익이란 것도 알게 됩니다. 수렵 채집이란 게 멧돼지처럼 큰 동물을 사냥하면 그날은 푸짐하게 먹고 지낼 수 있지만 사냥이 안되거나 가뭄이 들거나 하면 쫄쫄 굶어야 하는 것이죠. 남을 때 옆 부족에 좀 나누고, 모자랄 때 꿔 가는 식으로 원시 교환 사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초보적인 물물교환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옮겨가게 됩니다. 사람들의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게 되지요. 두달전에 우르르 부족에 우크루에게 닭 한마리를 빌려준 적이 있었는데, 오늘와서 모르쇠로 일관한다거나, 난 사과가 필요한데 상대방은 보리밖에 없을 때는 물물 교환 자체가 힘든 것이죠.      


이때 뭔가 공통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하고, 잘 썩지도 않고, 보관하기도 간편한 것. 이런 점은 각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어떤 사회에서는 쌀과 같은 곡물이 교환의 매개체가 되고, 또 어떤 사회에서는 조개껍질이 활용되기도 하지요.      


돈이란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돈이란 개념은 전 문명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에 대한 실제화는 각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물건과 바꿀 수 있는 가치를 가진 그 어떤 무언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나오는 절대불변의 존재처럼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돈이 나타난 것이죠.    


  


이 돈은 돌고 돈다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돈 자체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죠.      


이 돈의 속성이 어떤 한 물건에서 발현되도록 사람들끼리 약속을 합니다. 그 물건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쌀과 같은 곡물이 될 수 있고,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조개나 동물의 뼈 같은 것도 될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들 물건에 돈의 속성, 그러니까 누구나 믿고 교환할 수 있는 가치란 것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 간의 '약속'이 필요합니다. 나 혼자 '이 구리 조각을 갖고 가면 쌀로 바꿔줍니다'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구리조각 한 돈이 쌀 한 가마니로 바꿔준다'라는 암묵적이든공식적이든 합의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합의를 뒷받침해주는 게 바로 관습과 지역 공동체 사회의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국가가 나타나면서 국가가 이 약속을 보증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로 본격 돌입하면서 정부와 함께 중앙은행이 이 일을 합니다. 가상화폐에서는 '블록체인'과 위변조 할 수 없는 '암호화' 기술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요.      


관념속의 돈이란 게 종이나 금속이나 먹거리 등에 발현되는 것, 단지 금속 덩어리나 다름 없었던 게 돈처럼 쓰이게 되는 것이지요. 약속과 보증입니다.      


이런 약속은 사회가 커지면서 명문화됩니다. 즉 문자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해서 커지는 것이죠. 로마 금화에 황제의 얼굴이 박히면서, 이건 황제가 만든 공식적으로 믿을만한 것이다라고 명문화해주는 것이고요.      


이런 약속이 믿음을 갖게 되면서 발달하는 게 바로 신용입니다. 돈을 꿔줬을 때 혹은 외상으로 했을 때 언젠가는 갚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바로 신용의 출현입니다.      


◇신용의 출현과 함께 초보적인 금융이 완성 


금융이란 것은 금전융통의 약자입니다. 돈을 빌려주고 통용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파이낸스인데, 라틴어 어원이 영어 '피니쉬'랑 같다고 합니다. 채무 관계가 돈을 갚고 끝난다라는 뜻입니다.      


이 신용이 생겨나면서 더 편리해집니다. 무거운 엽전이나 쌀을 '이거 돈이요'라고 들고 갈 게 아니라 종이 한장에 '누구누구 아무개가 언제까지 돈을 지급할 것이오'라고 어음을 만들수 있게 되니까요.      


신용의 탄생은 돈의 거래를 뜻하기도 합니다. 물물교환의 수단이었던 돈이 그 자체로 부가가치를 일으키는 매개체가 된 것이죠. 바로 돈이 돈을 불러오는 '금리'가 본격적으로 파생이 됩니다.      


금리는 무엇인가, 바로 이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봄에 쌀 한가마를 빌려왔고 가을에 쌀을 두가마니로 갚는다고 하면 금리는 100%가 되는 것이겠죠. 이런 금리가 나올 수 있는 배경도 빌려준 사람과 빌려온 사람의 모두 신용이 전제되고, (어디로 도망가지 않는다.) 그들이 있는 사회가 금전융통에 대한 보증을 국가나 혹은 국가와 비슷한 곳에서 해준다는 게 전제가 됩니다.      


따라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 잉여물을 가진 사람들은 이를 갖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바로 금리가 갖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금리는 시대와 차주의 신용도 등에 따라 바뀝니다. 마치 카멜레온 같습니다. 예를 들면 사회가 안정되어서 돈을 빌려간 사람이 도망가거나, 혹은 그렇다고 해도 국가가 대신 잡아주거나 다른 담보로 이를 벌충할 수 있다면 금리는 낮아질 것입니다. 반대로 떼일 가능성이 높다면 더 높은 이자를 받아야 하겠죠.      


이 같은 맥락에서 로마 시대 지중해 사회에서 금리는 낮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오현제 시대에는 4~5% 정도 됐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세에 오면서 이 금리가 높아집니다. 상시 전쟁이 있었고, 국가라는 것 자체가 파편화돼 있다보니까, 돈을 떼일 것이라는 걱정이 높았기 때문이지요.      


사회의 안정성과도 큰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날 보면 알 수 있는데 선진국이고 그 사회가 안정된 사회일 수록 금리가 낮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욕을 하는 일본도, 거의 30년 가까이 제로 수준의 금리를 유지하고 있죠. 지진 같은 자연 재난이 아니라면, 전쟁이 날 위험도 적고, 경제적인 안정도 상당히 올라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에 들었다고 할 수 있는게, 우리의 시중금리가 다른 선진국과 이제는 큰 차이가 없을 정도가 된 것도 있습니다. 극명한 예로 우리의 국채 금리를 봐도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금리의 출현은 금융을 더 고도화합니다. 그리고 금리의 의미도 다양하게 됩니다. 단순하게 이자를 뜻하던 것에서 수익률까지 포괄하는 개념까지 가게 되기도 하지요.      


로마제국 이후 중세시대를 넘어오면서 높은 금리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 자체가 혼란기였고, 상공업 자체에 대한 천시가 있었고 상업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종교가 중심이 된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상업 경제가 지체됐고, 이는 돈의 유통도 많지 않았습니다. 돈이 고여 있고 거기서 소화되었던 것이죠.   

   

이런 와중에 이득을 얻었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지중해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였습니다.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을 연결하는 교역로 역할을 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이런 교역의 통로를 더 넓혀주는 역할을 했고요.      


바야흐로 지중해 무역의 중심 시대였습니다. 현대적인 개념에서 봤을 때 '은행'과 비슷한 것들이 이들 제노바나 베네치아 등에 등장합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신용과 문자, 장부가 합해지면서죠.      


◇바다무역의 활성화 → 금융의 진화, 은행의 출현 


예를 들면 제노바 상인 다비드가 있다고 칩시다. 대대로 제노바에서 무역업을 했던 터라 제노바 안의 금융업자와 죽 거래를 해왔습니다. 제노바에 오래 살았고 대대로 거래를 했기 때문에 '돈을 떼일 수 있는' 가능성이 낮고 신용이 있는 것이죠.      


이 업자한테 돈을 빌리기도 하고 갚기도 하고 맡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장부에 적죠. 그 장부는 오늘날의 계좌와 같아요.      


그런데 제노바 안의 다른 로베르토라는 업자한테 대금을 치를 일이 있어요. 그럴 때 장부에서 다비드의 기록에서 돈이 빠져나간 것을 쓰고, 로베르토의 장부에 이를 적습니다. 실물의 이동 없이 바로 거래가 완료된 것이지요.      


그리고 대출이란 개념도 생겨납니다. '좀 있으면 우리 배가 들어올 것인데, 이거 들어오면 갚을 때니까 잠깐 융통좀 해줘'라고 하고, '예 좋아요, 대신 월 10% 이자입니다'라는 식입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사악한 금융업자 셔얼록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은행업자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다만 이때도 어디까지나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종교나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노동없이 부가가치를 가져가는 행위에 대해 안좋게 보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보는 것인데, 이를 유태인들이 했던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이들 금융업자가 입찰제로 해서 세금을 걷기도 했습니다. '서울 명동에서 100억원의 세금을 걷겠습니다'하고 150억원을 걷어 50억원은 인마이포켓을 했던 것이죠.      


어찌됐던 초기 금융업자라고 하면 오늘날 사채업자와 크게 다를 게 없었습니다. 사실 현대 은행들도 그 원류를 타고 올라가면 사채업자이긴 하죠.      


상업이 활발해지고 신용거래가 또한 활발해지면서 지중해 금융시장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이룹니다. 초기 은행의 형태, 보험의 형태, 주식회사의 형태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인기 무역품목이 '후추'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인도에서 가지고 와서 서유럽에 이들 무역도시들이 팔면서 쏠쏠하게 이익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바뀝니다. 바로 오스만투르크의 등장이었습니다. 상징적인 사건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이스탄불을 이 아시아 제국을 장악하고 그 무역 교통로를 막아버린 것이죠.    

  

서유럽 국가들은 당장 교역을 하는데 있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교역로가 오스만투르크라는 독점기업에 의해 독점된 상황이다보니까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도 가격이 올라갈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때 서유럽국가들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때가 어느때냐 종교개혁과 르네상스가 일어나던 시기였죠. 종교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변모했고 상업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상업의 발달은 돈의 유통을 불러일으키고 정보와 지식의 확산을 뜻합니다.      


가만히 시골 마을에서 수도사들의 가르침만 받던 중세인들이 '아 내가 알던 세계가 그게 다가 아니었구나'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 변화를 촉발시켰던 게 바로 쿠덴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이었고요.    

  

르네상스는 한 마디로 '의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존 것에 대한 '의심'입니다. 의심은 도전을 낳게 됩니다. 바로 대항해시대의 개막이 되는 것입니다.     

 

오스만투르크가 장악하고 있는 전통 동방 교역로 대신에 대서양을 건너 직접 인도와 교역하려고 했던 이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지식이 촉발점이 돼 연결연결이 됩니다.      


콜럼버스는 동방견문록을 보고 아메리카로 탐험을 했고, 이후 많은 탐험가들이 남미와 북미에 당도합니다. 그리고 이 탐험 기록들은 출간되면서 지식의 축적이 일어납니다. 과거 기록을 학습하고 그것을 진일보하는 식으로 대서양 무역항해를 넓혀갔던 것입니다.      


여기서 볼 게 있어요. 대서양 항로는 항해도 길고 바다도 지중해와 비교할 수 없이 거칠다는 점입니다. 무역을 하지만 위험도가 클 수 밖에 없어요. 제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매번 그 비용을 대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1600년대 들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집니다. 돈이 많이 드는 대서양 무역을 보다 전문화하면서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한 사람, 한 귀족, 한 왕이 전부 책임지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자본금을 대고, 무역이 잘 되어 수익금이 나왔을 때 그 수익금을 동시에 나눠 갖게 되는 것이지요.      


주식회사의 출현입니다.       


◇대서양 무역의 시작, 주식회사와 보험의 출현 


보험도 이 시점에 출현하는데, 보험업계에서는 런던대화재를 꼽습니다. 1666년에 일어났는데, 엄청난 피해를 봤다고 해요. 여기서 바뀐 거. 과거에는 이런 재난을 신이 인간에게 주는 형벌로 봤어요. 그런데 이성의 시대에서는 미리 재난을 막고 혹 재난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서 돈을 적립하고, 위험을 분산하자는 아이디어가 체계화됩니다.      


은행과 보험의 출현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식회사까지 나왔고. 주식회사의 주식이 산발적으로 거래되다가 특정 곳에서 모여 거래가 되고 거기 안에 거간꾼이라고 해서 중개자가 생깁니다. 새로운 시장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바로 거래소의 등장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어느 한시점에 딱 나왔다고 보기 힘들어요. 조금씩 조금씩 몇백년에 걸쳐 체계화되었고, 상업의 시대, 대항해의 시대,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고도화되고 체계화됐던 것이죠.      


여러분,      

상업에서의 기본은 무엇이죠? 싸게 들여와서 많이 파는 것이죠. 싸게 하는 것은 단시간에 남보다 많이 생산하는 게 있고, 비용을 덜 들이는 것도 있어요. 어떻게 하면 싸고 많이 생산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기계를 만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강 옆에 수차를 통해 했죠. 이것은 기계공학적으로 한계가 컸고, 위치적인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증기기관을 본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공장이란 게 강 옆을 떠나서도 만들어질 수 있게 됩니다. 기계가 발달이 되고 이것들이 또 파급되면서 대단위 공장이 만들어집니다. 기업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이게 바로 오늘날 산업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분입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산 효율이 높아지게 된 것이죠.      


이게 왜 중요한가. 활쏘기와 총쏘기의 차이로 보시면 됩니다. 기존 인력과 가축 등에 의존한 생산은 그 숙련도가 높아지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기술은 고급화로 갈 수록 폐쇄적이죠. 중세 유럽에서 길드가 발달했던 것도 이런 폐쇄적인 기술 이전, 소위 말해 도제라는 시스템과 연관이 있어요.     

 

활쏘기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사수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근력을 늘려야 하고, 매일같이 연습을 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근력의 차이는 사람마다 크기 때문에 일률적인 실력이 나오기도 힘들죠.     

 

그런데 총이란 것은 많은 부분 자동화돼 있습니다. 활 시위를 당길 게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면 됩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화약을 넣고 총알을 넣고 방아쇠를 당겨 불을 붙이면 되는 것이죠. 이런 과정도 자동화됩니다.      

그리고 총을 쏘는 방법을 알면 언제든 바로 살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총알을 발사하는 속도도 늘어나기 마련이고요. 살상력도 커질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총은 생산이 쉽죠. 활과 비교했을 때, 대량 생산이 가능합니다.      


즉 자본을 투자함에 따라 많은 기계를 들여놓을 수 있게 되고 이는 생산력 증대로 이어집니다. 일 잘하는 소수의 장인을 얼마나 확보하는가가 아니라 자본의 투입 정도에 따라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야흐로 대량생산, 과잉 투자의 시대로 간것입니다.      


이 투자금은 어디서 비롯될까요? 바로 현대화된 은행이 되겠죠. 금융과 산업 자본의 유착이 더 끈끈하게 이뤄지고, 이 금융은 과잉생산을 이끌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게 19세기 말 대불황기입니다. 근대 사회 구조와 생산 시스템에서 생산력의 증대로 과잉생산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죠. 물건을 팔아야 하는데 팔기 위한 시장의 확보 경쟁으로 가게 됩니다.      


19세기 우리나라에 왔던 이양선을 생각해보세요. 물론 조선이 엄연한 정규군이 있는 문명화된 나라라고 하지만, 이들 이양선, 서양에서 온 배들이 요구한 것은 '교역하자'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물건을 사달라가 될 수 있는 게 되고요.      


그전 생산 원료를 구하기 위해 약탈적으로 식민지화를 했던 것과 달리, 문명화된 사회와의 교류를 하게 되고 더 나아가 소비시장이 될 수 있는 식민지를 찾았던 것이죠.      


19세기 말에 세계질서 주도 국가는 어디였죠? 영국입니다. 산업혁명이 먼저 시작했고, 해양국가로 가장 많은 소비 시장과 원료를 조달할 수 있는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 후발주자가 독일이었고, 그 뒤를 이어 미국이 나서게 됩니다. 다만 미국과 독일이 다른 것은 뭐냐, 미국은 그 미 대륙 자체만으로도 자원이 풍부해요. 미지의 개척지도 많고요. 투자를 통한 성장을 계속해서 해 나갈 수 있었던 곳이 미국입니다.      


반면 유럽대륙에 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러시아 등에 둘러싸인 독일은 미국과 같은 이점을 누리기 힘들었습니다.      


영국처럼 산업화를 이뤘고 여러 시장에서 영국산을 밀어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시장이 부족한 상황에서 영국에 뒤처질 수 밖에 없었죠. 영국 주도의 시장 질서에서는 성장의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고요.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생산력은 크게 증대되어 과거 100년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많은 생산을 할 수 있게 됐지만, 후발주자 독일과 미국이 쫓아오고, 성장의 한계를 이르게 됩니다.      


19세기말 대불황기라고 해서 거의 20년을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됩니다. 물건을 넘쳐요. 그렇지만 그 물건을 사는 수요가 창출되지 못하다보니 물건 값은 계속 내려갈 수 밖에 없게 됐던 것이죠.      


영국 등은 억지로 식민지에 내다 팔 수 있었지만, 후발주자 독일은 그럴 수가 없었죠. 이에 들고 일어나서 한판 붙게 된 것이 1차 세계대전이라고 볼 수 있어요.      


대량생산 체계는 전쟁의 체계도 바꿔놓습니다. 과거 전쟁은 군대 간의 전투 혹은 왕과 왕의 전투였다고 하면 1차세계대전부터는 거의 총력전이 된 것이죠. 각국 나라의 생산력과 생산력의 대결이 된 것이죠. 쉽게 말해 어느 나라가 더 많은 군인을 양성하고 총과 대포를 만들고 적군을 제압할 수 있는 신무기를 만드는가이죠.      

승패가 이렇게 귀결되다보니, 기술 발전에 더 박차를 가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되지만 국제적으로 생산 기술은 더 고도화됩니다.      


◇국민국가의 출현, 주식투자의 보편화 


또 한가지 주목해야할 점. 국민국가가 되면서 자본시장도 체계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죠. 바로 주식회사의 주식 거래가 20세기 이르러 더 활발해졌다는 뜻입니다.      


1930년대 조선의 조선일보 등을 봐도 일본이나 미국의 증권시장 시황을 전하는 뉴스란이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주식시장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입니다.      


그 유명한 대공황의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대공황도 엄청나게 많아진 생산품을 소화해주지 못아다보니까,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던 것이죠.      

그런데 대불황의 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대공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잖아요. 20세기 들어 라디오를 비롯한 대중 매체가 활성화되면서 보다 그때 당시 상황에 대해 보다 많은 얘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고,      

상징적이면서도 시각적인 게 바로 주식 시장의 대폭락입니다. 주식이 몇 % 정도 대폭락을 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기업의 도산이 곧 다수 주주들의 피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기업의 도산이 단순히 소수 자본가의 피해로 가는 게 아니라, 주식을 가진 대중,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이죠. 이런 대폭락의 심리를 당시 사람들이 몸소 느낄 수 있었고요.      


이건 통화량과 관련된 금융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왜 19세기 대불황기와 20세기 대공황기가 발생했을까. 둘다 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과다 생산이 컸고, 이를 소화해줄 시장이 부족했다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이 둘간에는 지금과는 다른 돈의 관점이 있습니다. 통화량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이때는 돈의 개념이 무엇에 묶여있었는가, 바로 금입니다.      


이때 화폐의 개념은 어떤 것이냐, 이 종이 쪼가리나 동전 무데기를 은행에 가져가면 금과 바꿔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보증이 전제돼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금본위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이 금본위제가 왜 중요한가 하면, 예전 대원군의 당백전의 사례처럼 무분별하게 화폐를 찍어대면 화폐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교환 수단으로서의 힘을 잃게 되는 것이죠. 신용화폐에 대한 대중적 믿음이 부족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생산력은 기술의 발전으로 막 늘고 있는데 시중의 통화량은 그만큼 늘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있었던 대불황기는 통화량이 늘지 않음에 따라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겪었던 것이고요.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처럼 자체 화폐를 찍어낼 수 있어요. 그런데 19세기 대불황기나 20세기 초 대공황기의 이런 경제현상은 각국이 연쇄적으로 연결돼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국제 통용화폐는 뭐였겠어요? 바로 금이죠.      


시장이 늘어도 통화량이 증가하지 않으면 그 경제는 디플레이션에 빠지게 됩니다. 그 통화량을 국제적으로 믿을만한 화폐로 묶어서 늘려줘야 하는데 2차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해줄만한 게 파운드화나 달러화 등등이 있었겠지만, 부족했던 것입니다.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면서 믿을만한 화폐말이죠.      


◇대불황과 경제대공황의 교훈→ 달러화-금태환 시스템 출현 


2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때 즈음, 새로운 금융질서 확립을 위해 모입니다.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던 대불황기, 2차 세계대전을 직접 유발했던 대공황기가 일어났던 게, 달리보면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있었고, 이는 국제적으로 이를 뒷받침해줄만한 통화량이 적절하게 늘어주지 못했던 것에 있는 것으로 봤던 것이죠.      

이 같은 배경에 따라 국제적으로 공인된, 통용 기축통화에 대한 필요성이 개진됐고, 달러가 부상하게 됩니다. 그 직전 전세계를 주름잡았던 영국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피해를 직접 받았고, 전쟁을 치르느라 빚을 미국으로부터 많이 졌지요.      


아무리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산다고 하지만, 빚많은 옛적 부자가 발행하는 통화를 믿고 쓰겠어요?      


승전국이자, 드넓은 땅을 갖고 있고 새롭게 발돋움하는 미국의 달러화가 자연스럽게 국제적인 통화가 됩니다. 게다가 세계질서와 세계 공용어도 19세기에서 20세기초반까지 영국이 주름잡으면서 깔아놓은 소프트웨어가 있다보니, 영어를 쓰면서, 영국에서 파생됐다고 볼 수 있는 미국이 안주인처럼 행세할 수 있게 됐어요.    

  

미국이 전세계의 중앙은행 역할을 해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전세계 기준 통화를 미국 달러화로 해요. 그리고 그 달러화의 가치에 비례해 각국 통화량이 변화할 수 있도록 고정을 시켜놓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달러화를 금과 바꿔주겠다고 보증을 합니다. 바로 브레튼우즈체제입니다. 미국 35달러를 금 1온스에 고정했습니다.      


미국이 든든한 배후가 돼 세계경제질서를 주도하고, 대불황기나 대공황기처럼 국제통화량 부족에 따른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게 됐지만, 문제는 달러화 가치 유지에 있어요. 앞서 각국 화폐와 경제 규모, 그리고 금의 생산량 딜레마에 부딪힌 것이죠.      


경제규모는 급속히 성장하고 그에 따라 통화량이 늘게 되면 이에 비례해서 금의 양도 같이 늘어야, 금과 화폐의 태환 비율이 일정하게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금의 채굴양은 들쑥날쑥인데다, 경제규모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죠.      


특히 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건됐고 일본도 부흥했어요. 이들 나라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를 넘을 정도였어요. 50~60년대 다른 서구 국가들의 경제도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에 따라 국제 교역도 늘었고 세계 경제 체제 자체가 성장했죠.      


따라서 더 필요하게 된 것은 달러화입니다. 미국이 기축통화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한 이상, 달러화를 더 공급을 해줘야 해요.      


그런데 금의 양은 한정이 돼 있어요. 금보다 더 많은 비율의 달러화를 찍어내면 달러화의 태환 비율은 적어질 수 밖에 없어요. 다시 말하면 시장에 달러화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달러화의 가치는 떨어질 수 밖에 없어요.      

달러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서 미국이 달러화 공급을 줄인다? 그렇게 되면 대공황이나 대불황기 때 겪었던 국제적인 디플레이션, 즉 돈의 부족에 시달리게 될 수 있게 됩니다.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이런 부분도 어느정도 용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해가 갈 수록 미국이 더 손해가되는 부분이 되는 거에요. 이미 미국 1달러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떨어질 수 밖에 없는데 미국 35달러를 가져오면 금 1온스를 바꿔준다고 했으니.      


생각해보세요,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달러를 갖고 있느니, 금을 바꿔오는 게 더 이익이죠. 미국도 다른 나라들의 계속된 금 태환 요구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를 포기하는 수순까지 됩니다.      

게다가 미국도 상황이 좋지 않았죠. 1950년대 이후 일본과 독일 등의 성장하면서 미국과의 교역에서 무역흑자를 기록해요. 세계 최대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이들 나라의 제품이 선전하면서 미국은 막대한 무역 적자를 겪게 됩니다.      


이는 이들 나라들에 대한 달러의 유출을 뜻합니다. 달러를 계속 쌓아놓는 것이죠. 이 달러를 갖고 와서 "금으로 바꿔줘"라고 하면, 미국 입장에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따라 전비를 써야 하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부담해야할까요. 바로 달러를 찍어내야하는 것이죠.      


이에 따라 브레튼우즈체제가 붕괴됩니다. 다른 게 없어요. 더이상 달러 가져와도 바꿔주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이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습니다. 이때부터 세계 화폐 시장은 변동 환율제에 따라 굴러가게 됩니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게 된 것이죠. 이 같은 구조로 전환되면서 국제 핫머니들의 활동이 본격화됐고, 여기저기서 금융위기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1990년대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대전을 낳은 19세기 대불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