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문학에 대한 졸가리없는 이야기
의학(Medicine)은 사람이 걸리는 질병의 예방, 진단과 치료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제가 전공한 예방의학에서는 인구집단의 건강을 주로 다루고 다른 의학 분과에서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아서 건강도 의학의 학문적 영역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전체 의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압도적으로 건강보다는 질병의 영역이 더 큽니다. 그러니 의학은 인간의 질병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
학문으로서의 의학이 실제 현실에 적용하여 사용되는 경우에는 의료(Medical care)라고 합니다. 의료는 주어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조건 아래에서 의학적 훈련을 받고 자격을 획득한 의료인(Medical profession)이 사람의 질병을 진단, 치료하는 일이나 영역을 말합니다. 이 때 진단과 치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환자(患者)라고 하지요. 그래서 의학자라고 할 때는 의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를 일컫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되지만, 의사(Physician), 특히 임상의사는 업무의 특성상 과학자라기보다는 엔지니어(Engineer) 혹은 테크놀로지스트(Technologist)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고 정의하느냐는 학문에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 참으로 다양하고 방대한 작업이겠지만 의학의 분과에 국한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초의학을 주심으로 생각해 본다면 해부학은 사람의 물리적인 구조로 인간을 이해하고, 생리학은 인체의 기능을 중심에 두고 사람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부학은 인체의 지리학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생화학은 인간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경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화학적 반응을 학문적 주제로 하지만, 특히 인간에 주목하면 의학 생화학 혹은 인체 생화학이 됩니다. 여기에 더해 사람 안에서 혹은 밖에서 살아가면서 사람과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는 미생물을 다루는 미생물학 그리고 기생충학까지가 주된 기초의학 분야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목에 더하여 정상 구조와 기능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상을 공부하는 병리학, 질병을 치료하거나 완화하는(때때로는 악화시킬 수도 있는) 약물을 주제로 하는 약리학도 기초의학에 포함됩니다. 그 외에도 학문의 발달에 따라서 다양한 기초의학 영역들이 분화되어 나오지요. 대개 의과대학 교육과정의 전반기인 예과에서부터 본과 1, 2학년에 걸쳐서 배우는 과목들입니다.
이 과목들에서 익힌 기초의학적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학년이 올라가면서 인간의 질병을 다루는 임상의학들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고, 이 때는 강의실에서의 이론 뿐만 아니라 병원에서 직접 환자들을 대하면서 공부하는 임상실습이 중요해지게 되지요. 병원을 방문하시면 보게 되는 그 과목들을 떠올리시면 대개 이해가 되실 것 같으니 임상의학의 분과에 대해서는 길게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의학과 의료의 직접적인 주제는 모두 ‘질병’이지만, 그 질병은 언제나 ‘사람’의 질병입니다. 따라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의사들은 질병에 걸린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거니까요. 의료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은 질병으로 환원되는 존재가 아니라 전인적인 이해가 요청되는 인간 존재입니다. 그러니 질병을 앓는 인간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체험적으로, 이론적으로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에 기반한 인간 이해가 의사들의 인간 이해에서 가장 핵심이 되지만, 그러니까 의학적 인간학이 의사들의 인식 체계에서 중심을 이루겠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완결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의학교육에서 의료인문학 혹은 인문의학과 같은 영역이 필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인문학의 핵심 영역을 흔히 문사철(文史哲), 그러니까 문학(文學), 역사(歷史), 철학(哲學)이라고 합니다. 범속(凡俗)한 분류이기는 하지만 유용한 분류라고 생각합니다. 문사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역시 다양하고 방대한 작업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역사를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 문학을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 철학을 사람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라고 간략하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인문학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경험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탐구가 핵심에 있을 수 밖에 없는 학문입니다. 그러니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의학과 인문학은 ‘사람’을 중심에 두고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의학도와 의사들이 인문학을 배우고, 인문학자와 인문학도들이 의학적 인간학을 배운다면 그 틈새 어디에선가 좀 더 나은 의학과 의료, 좀 더 확장된 인문학적 시선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제발 그 인문학 공부는 ‘다이제스트 인문학’이라던가, ‘한 권으로 끝내는 인문학’ 이런 건 아니기를 바랍니다. 기초를 이루는 의학적 원리와 내용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없는 치료법이 사이비나 유사 의학이 되듯이, 성찰 없는 인문적 접근도 유사 인문학이 될 위험이 다분할테니까요.
의정사태로 나라가 온통 불난 집 같습니다. 이런 시국에 무슨 한가한 이야기인가 싶지만, 생각이 어지러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보는 일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부와 의사는 이토록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지, 그 와중에 국민(이라고 쓰고 사람이라고 읽습니다)들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사람에 대하여, 사람다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람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너무 많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 그저 이렇게 살아도 좋은 것인지 곱씹고 되묻게 됩니다. 남 탓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우울하고 화나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