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5
영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오랜 시간 함께한 물건들을 떠내 보내는 때가 종종 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약 5년 간 나와 함께해 준 쥐색의 긴 가디건. 주변 사람들에게 "넌 가디건이 그거밖에 없냐."라며 핀잔을 받아도 마냥 좋고 편했던 그 소중한 친구를, 여행 도중 깜빡한 모양이다. 날이 추워지고, 슬슬 새로운 가디건을 사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별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태로.
롯데월드몰의 H&M, 여성복 매장. 잘못 들어왔지만 구경이라도 해볼까 싶어 둘러보던 도중 첫눈에 반했다. 친구와 점심으로 카레를 배부르게 먹고, 친구는 신발을 사고, 나는 바지를 좀 샀다. 마무리가 될 때쯤. 나는 친구에게 "지금 H&M의 여성복 매장을 가야 할 것 같아."라고 나지막이 말했고, 가디건과 나는 한 배를 타게 되었다. 29,900원이라는 금액에 비해, 오랜 기간 많은 것을 해준 그 친구.
소매가 엄청나게 늘어나 항상 걷어입어야 했고, 제법 많이 해지고 이곳저곳에 구멍도 났었고, 주머니가 없는 게 은근 불편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친구의 색이 참 좋았고, 어깨부터 길게 늘어뜨려진 그 느낌이 참 좋았다.
5년 후, 내가 찾은 곳은 런던의 중심지. 여성복 매장은 1층에 있었고, 내가 찾는 가디건은 입구에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예전이랑 달라진 게 별로 없네, 하며 가격표를 살펴보니 £18.99와 함께 ₩29,900가 보였다. 반가웠다. 5년 간 나는 너를 제법 소중히 대하지도 않았고, 결국에 나는 너를 잃어버렸는데도, 너는 나를 잊지 않았구나. 여전히 그 자리에. 같은 가격으로.
쥐색은 내게 맞는 사이즈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배송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굳이 매장에서 데려가고 싶었고, 귀리색의 친구를 데려왔다. 옛 추억의 대용품이 아닌, 새로운 기억을 함께 하기로 다짐하며.
옛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점은, 내가 누군가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딘가에서 잊어버리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길거리를 활보하는 가디건 갱단에게 약탈당할지도 모르니까. 순간순간을 사랑하는 하루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