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통학생

by 김 경덕

열차 통학생


교통편이 부족하던 50,60년에는 도시 인근에 거주하는 지방 학생들을 통학 편의를

위해서 대 도시마다 통학 열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부산에는 두 편의 통학 열차가 있었다.

하나는 마산을 출발하여 삼랑진에서 경부선을 바꿔 타고 내려오는 마산행 통근 열차,

다른 하나는 경주를 출발하여 동해 남부선을 타고 내려오는 경주행 통근 열차이다.

고등학교 시절, 구포가 부산에 편입되기 전 즉 시내버스가 운행되기 전까지 우리는 경부선

열차 통학생 신분으로 아침저녁으로 마산행을 이용하여 학교에 다녔다.


지금 60대 이상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대 도시 인근 작은 읍이나 면 소재지가 있는 시골 역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통학을 하는

학생들의 일상 태도나 행동거지들을,,,,,

아무튼 일제 시절 일어난 11,3 광주 학생 운동의 발단도 열차 통학생으로부터였다.

우리들은 대부분 새벽 6시 전후에 집을 나서 8시 이후에야 귀가를 한다.

특히 수업이 끝난 방과 후에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극히 일부 학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합기도, 당수도, 유도, 검도 등 도장(당시에는 태권도 도장이 없었다)에 다니거나

역전 주위에서 여학생들과 노닥거리면서 귀가 열차를 기다리곤 했다.

당연히 이런저런 형태의 불순한 패거리가 생겼고 때론 운동으로 다져진 각자의 한 주먹이

있어서 인지는 몰라도 항상 다른 학생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즉 통학생끼리는 학교 선후배 간 이거나 출신 지역별로 이거나 아니면 운동하는 도장 등으로

자연스럽게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다.

가끔 못난 선배들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매달 각출당하기도 했지마는,,,,


고등학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먹거리가 신통치 않은 시절, 새벽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서는 통학생 등에게는

도시락은 하루의 생명줄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열었더니 도시락이 비어 있었다.

2교시가 체육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에 누가 실례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생명줄 같은 열차 통학생의 도시락을,,,,,,,

수소문 끝에 범인을 찾아놓고 보니 우리 반에서 나 보다 체격도 훨씬 크고 한 주먹 한다고

소문난 이 *호였다.

부산 영도 봉래동 우범지대 출신이라고 스스로 으스대며 무용담을 자랑하던 급우였다.

하도 억울하여 앞뒤 가릴 것 없이 나는 대어 들며 잘못을 따졌다.

당연히 돌아온 건 그 녀석의 주먹, 통학생 배짱으로 대어 들다 제법 많이 얻어맞은 것 같다.

이 사실이 같은 반 다른 통학생의 입을 통해 선배 통학생에게 전달이 되었다.

다른 친구의 도시락을 조금 얻어먹고서는 허기진 배로 분통을 삭히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다음 날 이 녀석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 다음날 이 친구가 학교를 나오기는 나왔는데 얼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쉬는 시간에 다른 친구를 통해 나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나는 전 전날 맞은 일로 불안해했는데 상황은 정 반대였다.

기가 죽을 대로 꺾인 이 친구가 어렵사리 말을 끄집어내며 나에게 사과와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서는 내가 직접 선배를 찾아가 사과를 받았다고 말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학교를 나올 수가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내 도시락 사건 때문에 열차 통학생 선배들에게 불려 가 얼굴이 저 지경이 되도록 호되게

경을 치렀던 모양이었다.


수 십 년이 지난 후 서울의 한 예식장에서 같은 반이었던 동창생 아들 결혼식 하객으로 올라온

이 친구를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너, 졸업 후 처음 보제?"

"그렇네"

"그래, 뭐하고 묵고 사나?"

"부산서 족발집 한다 아이가, 한 번 놀러 오너라,

옛날 너 도시락 까먹은 거 열 배로 갚아줄게"

"와, 난 지금도 열차 통학생 말만 들어도 겁이 난다 아이가,,,,,"

친구는 나를 만나자마자 옛날 도시락 사건이 제일 먼저 되살아 났던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열차 통학생들을 바라보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 눈은 곱지가 않았다.

모두 다 건달이나 깡패 같다 둥, 양아치 똘만이라는 둥, 심지어 부산 형무소에는 반은 김해(경부선)

출신이고 반은 울산(동해 남부선) 출신인데 그중 대부분이 통학생이었다는 둥 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우리 열차 통학생들은 배워 보려고 아니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보려고 기를

쓰며 먼 길을 왔다 갔다 했다.

때론 발악을 하며 어려운 시기를 줄타기하듯 잘도 넘기면서 살아왔다.


참 얼마 전 이 친구의 부고장을 받았다.

2015,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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