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모인 인원이 아마도 10명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누구네 집 정원인지, 공원인지는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야외였던 것은 분명하다. 커다란 천막 아래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고 음식도 제법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날 파티가 가족 모임이었는지 다른 지인들의 회합이었는지는 역시 기억이 희미하다.
우리는 식사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계속 담소를 나누었다. 두 명, 또는 서너 명씩 모여서 서로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야, 너 먼저 가는 거야?" 한 친구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저만치 걸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던 지라 나도 뭐라고 한 마디 보태며 그를 향해 한 두 걸음 나아갔다.
그 친구가 느린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어!"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을 보고 저절로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단정하게 2:8 가르마를 한 금발 백인의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 뒷걸음을 쳤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무엇인지 봤기 때문이다.
장총이었다.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지만 사냥총인 것 같았다. 이런 생각하고 아마 1-2초도 안 지났을 것이다. 철커덕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굉음이 들렸다. 내 오른팔 팔뚝에 찬 금속성 물질이 스치는 것을 느낀 것도 거의 동시였을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금 철커덕 장전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제 나를 향해 한 두 걸음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난 곧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치게 될지를 예감하고 온 몸이 얼어붙고 있었다.
그가 두 번째로 총을 치켜들 때까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몇 초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도대체 저 친구가 왜?' '오늘 모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난 모임 내내 웃음 띈 얼굴을 잃지 않고 모두에게 나이스하게 대한 것 같은데' '그 친구 얼굴은 어떻게 낯선 백인의 얼굴로 바뀐 거지?' '난 아직 죽을 준비가 안되었는데,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남겨야 하는데 이대로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다음 장면에는 총소리를 듣고 놀란 멍멍이들이 요란스럽게 짖으며 도망하는 모습이든지 아니면 멀리서 옆 집 개가 짖는 소리라도 들려야 정상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엔 그 바로 직전에 꿈에서 깨어났다. 주먹을 꽉 진 손 안은 땀이 끈적하게 배어 있었고 맥박도 몹시 급하게 뛰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6시 반에 눈이 떠졌다가 오늘은 토요일인데 좀 더 자야지 하고 잠을 청했던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깜박 다시 잠이 들었었나 보다. 나는 겨우 15분 동안 유치하고 앞뒤 안 맞는 영화 한 편을 찍었던 것이다.
사실 위에 쓴 (개) 꿈 이야기는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난 후 눈을 감은 채 누워있으며 했던 생각과 꿈 이야기가 뒤섞였을 가능성이 크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지 않던가. 잠을 깬 후에도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서 꿈 되새김질을 했다. 이 꿈은 무엇을 반영한 걸까?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하나?
왜 한국인인 그가 백인의 얼굴로 둔갑했을까. 요즘 미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아시안 혐오 범죄의 영향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것이 난 그런 경험이 전무할 뿐 아니라 솔직히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백인의 얼굴이 화가 나 있거나 일그러져있지 않고 오히려 평온하다고 할 만큼 무덤덤한 표정이었던 점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꿈속 급박한 상황에서도 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난 아주 나이스한 사람인데 왜 내가 타깃이 되었나. 하지만 다시 생각을 해보니 난 어쩌면 내가 상대하고 싶은 사람 하고만 얘기를 하느라 그 사람을 유령 같은 존재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비록 눈이 마주치게 되면 가벼운 미소를 보냈을지라도. 어떤 모임에서, 대인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누가 나를 적대시할 때만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 나를 정중하게 대하지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처럼 대할 때 소외감을 느끼게 되지 않던가.
꿈은 1인칭으로 꾸었지만 백인 얼굴로 바뀐 '그'에게 내가 투영되었던 것은 아닐까. 난 현실에서 그런 경험 또는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잠재의식 속에 총을 쏘는 사람, 혹은 총을 맞을 뻔한 사람이 상징하는 것들이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곧 총에 맞을 거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에 나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걱정했다. 가족들에게 뭔가 한 마디 말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내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이 있는 걸지 모른다. 감사 또는 사과를 미루어 놓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난 대체적으로 꿈을 꾸기 시작한 후 금방 잠에서 깨어나는 편이다. 조금이라도 비현실적인, 불합리한 일이 발생하면 이게 생시 일리가 없다고 여겨져서 꿈에서 바로 빠져나온다. 재미없게도. 그런데 요즘 들어 꿈속에 깊이 몰입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물론 오늘도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기 직전 깨어나긴 했지만 예전 같으면 한참 전 얼굴이 바뀌는 순간에 깨어났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정신줄이 느슨해진 것일까.
암튼 생각 회로에 늘 부하가 걸려있는 나는 꿈 덕분에 또 많은 생각을 한다. 죽을 준비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 밖에는. 내 앞에 다가오는 얼굴들을 유령처럼 여기지 말고, 가면 미소로만 대하지 말고 귀한 존재라고 여기며 대하자는 것.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소중한 나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고 표현하자는 것. 좀 유치하고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꿈에서 얻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