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의 레거시부터 시작된 업에 대한 이야기
개인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업業에 대한 관점의 변화, 그리고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20세기의 업의 문화, 그리고 회사원에 대한 기억
내가 유치원생 ~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보통의 어머니들과 조금 다른 하나가 있다. 엄마의 책상에 작은 스탠드를 하나 켜고 파란 도면을 핀 채로 열심히 뭔가를 계산하고 그리던 모습이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우리가 자는 사이에 열심히 도면을 보셨는지 아침에 일어나 보면 영락없이 작업하던 도면이 펼쳐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귀엽게도 사내 커플이셨다가 결혼하셨다. 대기업 건설사에서 전기파트의 같은 팀에 계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팀에서 '가장 오지랖이 넓은' 사람으로, 어머니는 '수석 졸업 후 입사한 몇 안 되는 똑똑한 여직원'으로 유명했다고 한다(당시 어머니는 공대 전기과를 나오셨는데, 당시 여자가 대학 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뿐더러 한 학년에 여자가 2~3명 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부모님의 회사 동료분들과 아이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가고, 야구장을 가고, 서로의 집에 놀러 가 그 집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또래 친구로 서로를 챙기고 궁금해하며 연을 이어갔다. 나도 그 여정에 함께 있었다. 아직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OB모임에 종종 참석하신다. 그 시대 사람들이 보여주는 '회사'란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함께 삶의 길을 걷는 아주 단단한 연결고리였음이 틀림없다.
환장하게 멋진 블루프린트, 설계의 본질 물려받기
운 좋게 수시에 합격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건축을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환경조경디자인을 전공으로 택했다. 사람과 공간을 중심으로, '디자인', '식생', '공학'도 알아야 한다니. 나에게는 흥미를 끌기에 매우 매력적이었다. 설계할 때 엄마가 쓰시던 제도용품(삼각자, 스케일자, 0.3mm 샤프 등등)을 물려받았다. 분야는 달랐지만, 나만의 소중한 레거시였다. 개념들을 공부하고, 구조를 파악하고, 설계를 해나가며 후회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전기쟁이 어머니 아버지와 이런저런 대화가 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설계(기획) 분야들
대학을 졸업 후, 나는 다양한 것을 설계했다.
- 인테리어
- 공연 / 콘퍼런스
- 디지털 서비스
분야는 달랐지만, '사람'과 '공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현업 기준으로 말하면, '사용자'와 '인터페이스' 그리고 '경험'이 주요한 관점이 된다. 개념적으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분될 수 있다.
- 하드웨어 : 공간, 디바이스(인터페이스)
- 소프트웨어 : 사람, 경험(UX), 이벤트(프로그램, 기능)
이렇게 접근하면, 대부분의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메인보드(하드웨어)에 프로그램(소프트웨어)을 띄우는 것과 같다. 개념을 정의하고, 잇고, 정리하고, 다듬어가는 과정이 즐겁다. 내가 만든 것들이 실제로 쓰이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쾌감이 있다.
업이 돌아가는 패턴
직업이나 도메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설계'로 묶을 수 있는 업의 방식에서는 유사하게 존재하는 패턴이 있다. 내가 경험한 분야를 중심으로 설명해 보면 아래와 같다.
- 건축/조경 : 위치, 지형지물 및 역사/문화 탐색 - 용도 설정 - 대상 사용자 파악 - 요구사항 정리 - 설계 - 시공 - 감리 - 준공 - 공간 이용의 시작 - 유지보수(때론 재건축)
- 공연/콘퍼런스 : 이벤트의 필요/의미 정의 - 대상자 및 규모 파악 - 라인업 섭외(단독공연이라면 선행) - 공간 찾기 및 선택 - 공간/프로그램 상세 기획 - 운영 기획/교육 - 리허설 - 현장 진행 - 사후 정산
- 디지털서비스 : 문제 정의 - 타겟 사용자 설정 - 가설 설정 - 요구사항 정의 - 정책/설계 수립 - 디자인 및 개발 - 릴리즈 - 운영 및 유지보수 (방법론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인 스타트업 기준)
결국 설계와 맞닿은 업은 이 네 단계에서 움직인다.
사전 조건 확인 및 정리 - 요구사항 정의/설계 - 실행 - 사후 관리
다른 분야도 거의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이 패턴 속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디테일하게 쪼개어 볼 것인지에 따라 더 중요해지는 과정도 있고 덜 중요해지는 과정도 있기에 매번 다양한 시각이 필요해진다.
21세기의 업
21세기의 초반에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3차, 4차 웨이브를 경험했고, 이제 1/4 지점을 지나고 있다. 생활상은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 업의 형태나 본질을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마주할 가까운 미래에 업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겪거나 강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때로는 '일'이라는 것이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극단적인 예측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업業은 이제 명사가 아닌 동사에 가깝다. 직무나 직함이 아니라, 정체성 있는 사고방식이 나를 설명하는 시대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물려받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헤리티지로 남길 것인가.
이 고민이 우리의 새로운 업을 정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