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친구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매일매일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서울을 떠나 먼 타지에 정착했다. 그러나 친구는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삶의 터전이 되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먼 곳까지 갔다가 '여기'로 되돌아오는 것. 우리는 여기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지금-여기'를 일시적으로 떠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일종의 정신적 여행이다. '나'에서 '나'로 떠나는 여행이며 출발점도 종착지도 나라는 주체이다. 이 여행의 목적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 정신분석에서의 진리가 과학적 진리나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신분석에서 진리는 언제나 주체와 관련된 진리이고 이 진리는 주체의 욕망에 관한 것이다. 그렇기에 정신분석을 통해 드러난 진리는 보편적이지 않고 오히려 개별적이다. 주체로서의 내담자가 찾아낸 자신의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진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진리를 향한 여정은 나의 고유한 욕망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타자를 매개로 한 욕망이었음을 깨닫고 그 욕망을 추동시키는 중핵이 무엇인가를 알아 나가는 지난한 길이다. 진리를 향한 정신분석은 필연적으로 무의식을 탐사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개별적인 존재함, 진리는 무의식의 영역에 속해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자. 무의식이란, 흔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처럼 어떠한 실체로서 우리 내면에 억압된 채 자리 잡고 있는, 그리하여 나도 모르는 새에 나를 조종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라캉의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 L’inconscient est structuré comme un langage." 무의식을 억압하는 것은 언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시니피앙이기 때문에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표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은 언어의 빈자리, 결여로서만 등장한다. (따라서 라깡의 정신분석은 우리 담화 사이에 실수처럼 등장하는 순간을 포착하고자 한다) 무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은 억압이 실패하는 순간뿐이고 그 순간은 말실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침묵의 등장, 갑작스레 튀어나온 알 수 없는 말로써만 파악 가능하다.
그렇다면 시니피앙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억압하는가? 오손 웰스의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을 예로 들어 보자. 영화는 미국의 언론 재벌인 찰스 포스터 케인의 삶을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생전에 유명인이었던 케인이 죽고 언론사에서는 케인의 죽음을 대서특필로 다루고자 하는데, 한 기자가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 '로즈버드'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케인의 주변 인물들을 취재한다. '로즈버드'를 알면 케인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과 함께. 그러나 기자는 '로즈버드'의 의미를 알아내지 못하고 그저 케인이 갖지 못했거나 잃어버린 것 중 하나의 이름일 거라고 결론짓는다. '로즈버드'의 숨은 의미가 무의미로 판명 나면서 영화가 끝이 날 것 같았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로즈버드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그가 어릴 적 어머니와 헤어질 때에 가지고 있던 썰매에 적힌 문구였다. 로즈버드가 적힌 나무판이 버려야 할 것으로 분류되어 태워짐으로써 영화는 비로소 끝이 난다.
영화에서 로즈버드는 어린 시절의 상실을 표지하는 기표로서 등장한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상실한 것을 대리하는 기표의 지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아이는 어린 시절 살던 집, 눈 내리는 풍경, 어머니를 상실했다. 그리고 모든 상실은 그것이 있던 자리에 빈 구멍을 만들어 낸다. 빈자리는 그 자체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채워지기를 요구하는데 영화에서 그 결여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로즈버드'라는 기표이다. 상실이 '로즈버드'로 대체되면서 빈 구멍은 봉합된다. 케인이 유언으로 남긴 '로즈버드'는 두 번째 부인이 떠나던 날 그가 되뇌던 것이기도 한데, 많은 설명이 더해지지 않아도 우리는 발화된 '로즈버드'를 통해 두 번째 부인의 상실이 유년 시절에 겪은 상실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기표에 의한 억압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로즈버드'는 케인의 상실이 보합되고 남은 상흔이다. 케인은 '로즈버드'라는 기표를 가짐과 동시에 상실을 견디고 또 반복한다. 그러나 케인은 '로즈버드'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로즈버드'가 은폐하고 있는 상실을 대체할 다른 대상들을 찾아 나선다. 언론사에서, 여인에서, 조각품에서, 이 모든 것을 수집하는 공간인 제너두까지.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가 상실한 것은 '로즈버드'이기 때문에.
물론 영화를 통한 이 설명은 임상적 차원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것에 해당하며 언어에 의한 억압, 그리고 주체의 탄생은 보다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글은 여행으로서의 정신분석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초적 억압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고 간단히 언급만 하고 넘어갈 것이다. 언어를 통한 원초적인 억압은 부성 은유 la métaphore paternelle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은 채로 있었던 유아는 - 여기서 분리되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는 갓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특정 시기가 되면 어머니와 분리되어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부성 은유이다. 이 은유 과정을 통해 주체는 어머니를 상실하고 상징계로 진입한다. 여기에서의 상실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근원적인 충동의 대상으로서 어머니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영화 속 케인이 겪은 실제 어머니와의 이별과 그에 따른 상실은 주체가 겪어야만 하는 원초적인 상실이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주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시절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원초적 억압을 시행하는 부성 은유를 통해 진입한 이 상직적 세계에는 근원적인 충동의 대상을 상실하고 남은 빈자리가 있다. 이 결여를 채우기 위해 상징계는 끊임없는 기표의 순환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이 라깡이 이야기하는 환유적인 기표연쇄이며 욕망이 작동하는 기전이다. 라깡에게 있어서 욕망이란 근원적인 상실을 보전받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을 교체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상실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으며 거기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의 환유는 끝이 없다. 이러한 부성 은유는, 영화에 등장한 '로즈버드'와 같은 어떤 단어나 기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성 은유는 우리가 발음하거나 떠올릴 수 있는 실존하는 기표가 아니라 인간이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순간, 즉 상징계로 진입하는 그 순간에 일어나는 작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시점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아이가 어머니와 분리되는 그 순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물론 의식적 차원에서 '어머니와 나는 다른 사람이구나'를 깨닫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분리된/어머니를 상실한 아이는 결여를 채우기 위해 욕망의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나'가 정립되는 순간 아이의 세계는 '나'가 아닌('나'에게 귀속될 수 없는) 대상으로 구성되며 욕망의 환유가 일어나기 시작하며, 라깡은 이 과정을 ‘거울 단계’를 통해 설명한 바 있었다.(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영화 속에서 예시로 등장한 '로즈버드'는 이러한 원초적 억압 이후 상징계로 진입하고 나서야 가능한 기표의 각인이다.) 어머니의 상실을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어머니의 젖을 빨던 아이가 공갈 젖꼭지를 빨거나 자신의 손가락을 빨고 이후에는 이유식을 먹게 되는 것과 같다. 아이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포기해야만 한다.
부성 은유의 원초적 억압으로 상실한 것은 영원히 우리에게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접근불가능한 것은 우리 언어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잔여물이기도 하다. "나는 글을 쓴다"에서 주어로 사용된 '나'와 실제로 글을 쓰는 나는 같지 않으며 이 사이에는 분열과 괴리가 있다. 이러한 언어의 불완전성은 언제나 설명되지 못하는 잔여를 남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이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향하고자 하는 실천이다. 정신분석가는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를 말하도록 한다. 말할 수 없는 지점이 드러날 때까지, 혹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이야기하도록 말을 걸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정신분석가는 내담자의 근본 환상을 발견한다. 근본 환상이란 근원적 상실 이후 주체에게 발생한 결여를 채운 최초의 기표 덩어리,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 케인>의 예를 계속 든다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등장하는 '로즈버드'가 바로 그 근본 환상을 작동시키는 기표인 것이다. '로즈버드'는 기의 없는 기표이다. 기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기표는 주체의 역사 속에서만 새롭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잠시 부가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여기서 우리는 라깡이 이야기 한 '기표가 기의보다 우선한다, 우위에 있다, 선행한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로즈버드라는 기표가 선행하고 기의는 그 뒤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로즈버드'를 통해 대변되는 케인 내면에 발생한 상실, 버림받음, 사랑의 결여는 이후 케인의 삶과 그 안에서 추구되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로즈버드'는 언론사를 확장하고, 정치에 참여하여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고, 집착적으로 조각품들을 모으고, 자신의 젊은 두 번째 아내를 오페라 가수로서 사랑받도록 만들려는 케인의 욕망의 원인으로서 작동한다. '로즈버드'는 케인의 욕망의 중핵에서 작동하는 기표이며, 이 기표를 분석함으로써 정신분석가는 케인의, 내담자의 근본환상에까지 도달할 수 있고,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 임상적인 차원에서 정신분석의 목표라 할 수 있다.
근본환상의 중핵에 자리 잡고 있는 심리 구조, 로즈버드라는 무의미한 기표를 탐사함으로써 정신분석이 도달하는 곳은 진리를 알게 된 주체이다. 이유 없는 증상과 불안의 주체로부터 시작한 여행은 주체의 내밀한 근본환상에 도달함으로써 끝이 난다. 내가 반복하는 증상/욕망의 원인을 모르던 의식적인 주체는 정신분석이라는 여행을 통해 무의식의 주체에 도달하게 된다. 짧게는 1년, 길게는 수년까지도 지속되는 정신분석의 과정은 (의식적) 주체에서 (무의식적) 주체로 돌아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로즈버드'의 숨은 의미를 알아냈다고 해서 무엇이 바뀌겠는가? <시민 케인>에서 '로즈버드'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버려야 할 기표였던 것처럼, 정신분석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 주체의 진리를 밝혀낸다. 분석이 종료되고 난 후 주체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으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이 여행을 반복한다.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온 주체의 장소는 분명 이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기에. 삶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고 여전히 주체의 고통은 변함이 없을 터이지만 주체의 진리를 아는 자는 전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없으며 여기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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