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이라는 이름의 허례허식

그리고 나는 허례허식을 찾아 헤매는 이리

by ar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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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글을 쓸 때는 십 년 묵은 퀴퀴한 노트북으로 글을 쓰곤 한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키보드를 누르는 타건감이 익숙해서다. 물론 흐리멍텅한 화면과 외곽이 굵게 둘러싸고 있는 모양도 마음에 든다.
최근 신형 노트북을 인터넷에서 봤다. 요즘 노트북은 모두 화면이 UHD에 무게도 가볍다. 전체적인 모양은 점점 고 가늘어진다.
사실 최근에 신형 노트북을 하나 선물로 받았다. 우연한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노트북을 받아들자마자 십 년 묵은 나의 오래된 노트북을 외면하게 됐다. 덕분인지 신형 노트북을 사용할 때면 새로운 노트북만큼 나의 생각과 마음도 가늘어진 것만 같아 마음이 쓰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는 내 생각이 점점 가늘어진다고 느낀다. 예전만큼 수필을 자주 쓰지 않고 시도 쓰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내가 나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아주 고리타분한 말이다. 그러니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두꺼운 노트북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 정말로 내가 가늘어지고 있음을 매 순간마다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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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적인 말은 경험에 대입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능한 나는 내가 겪는 기분과 상황을 추상적인 말로 표현하지 않으려 하는데 대부분 실패하곤 한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전에 준비하던 소설에서도 썼던 문장이 있다. 애초에 감정이 물질로 표현되어 주무를 수 있는 것이었다면, 사람들은 감정에 휩쓸려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나는 감정을 무시하려 애를 쓰곤 했다. 만사에 무덤덤해지려 노력했고, 최대한 감정을 바깥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 방식이 어른을 닮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이 생각을 부정하는 중이다. 진짜 어른이 되려면 감정을 무시하고 숨기는 게 아니라 내 감정을 대면하고도 적절히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애초에 나는 방식을 잘못 습득했고, 덕분에 그 구렁텅이에 빠져 휘둘리는 중이다.


언젠가부터 정말 많이 감정을 외면했다. 그럼에도 매번 심장을 가르는 느낌이 나면 나는 낯선 공간 안에 붕 떠있는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 내 심장을 꺼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을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아프긴 아픈데, 무엇 때문에 아픈지 원인을 찾지 못한다. 그야 나의 고통을 유발하는 아픔은 전부 나의 밑바닥 속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외면하면 이렇게 된다.
덕분에 나는 나의 감정을 인식하는 법을 서서히 잊었다. 감정을 잊으니 과거를 돌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감정이 없으니 과거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텅 빈 공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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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는, 이 글에 나의 심정과 감정을 되살려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나는 항상 의미를 찾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살아가는 일이 아니라 의미에만 매달린 사람이 되어있었다. 목적을 잃은 셈이다. 길은 찾았는데 문제는 나아갈 힘이 사라졌다. 기껏 찾은 길이 무색해질 정도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또, 언젠가는 인간관계에 미친 듯이 회의를 느끼자마자 밖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사람을 피하고 가족도 피했다. 도무지 이야기를 할 힘이 나지 않았다.


신뢰하던 사람이 소속이 바뀌자마자 내게 사업 이야기를 하면 조금은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당시의 나는 사업 이야기가 본인의 내력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법인지 구분하지 못했었다. 그야 많이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오해가 될 만한 행동은 안 하는 사람인데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도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문제는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날 너무 믿고 내가 그 사람을 믿지 않았거나, 그 사람은 애초에 날 믿은 적이 없었는데 내가 그 사람을 믿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떻게 믿는 상황과 믿지 않는 상황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세상에는 살고 싶은 욕구와 죽고 싶은 욕구도 공존하고 사랑과 증오도 공존하니 신뢰와 불신도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애초에 모순 짓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가는 게 어렵다.
모순이라는 말을 꺼내니 또 생각이 난다. 나는 내가 모순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내뱉는 모든 말이 모순이라고 정의했던 적이 있었다. 인형에게서는 솜만 빠져나오듯이 나도 비슷한 종류였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모순(矛盾)이라는 말에 걸맞게 내가 창과 방패를 들고 다녀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내 힘으로는 창으로 방패를 뚫지 못할 것이고 방패는 창을 완벽히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완벽한 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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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내 곁에서 올라오는 기시감은 내가 쓰는 이 글이 꿈에서 쓴 글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쓴 글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덕분인지 나는 언젠가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잠을 한 시간 간격으로 깨면 이런 불상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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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오는 내내 존재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고 나름대로 끙끙댔던 것 같다. 물론 그 시도는 항상 실패였다. 애초에 존재를 정의 내리려는 시도는 오만한 짓이다. 존재는 하나의 단어로 설명될 수 없으며 문장으로 요약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꼭 이름을 붙여야만 안심이 됐다. 나는 도(道)에 가깝지 않은 사람이다. 진정한 도(道)를 모르는 것이다. 정의 내리지 않고 살아가면 편한데, 나는 자꾸만 의미를 찾고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한다. 아주 오래된 버릇이다. 그것도 아주 잘못 들인 버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