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욕망을 나의 것이라 착각할 때
어느 유명한 맛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거나, SNS를 가득 채운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의 사진들을 마주할 때면 묘한 초조함이 고개를 든다. 나만 그 흐름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나만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이다. 우리는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기꺼이 긴 시간을 기다리고, 사진 한 장을 남기며 비로소 안도한다. 하지만 그토록 갈망했던 그 장소에서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머문다.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이 정말 '나'의 욕망이었을까. 혹시 우리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욕망의 삼각형: 내 것이 아닌 갈망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인간의 욕망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통찰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대상을 직접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망하는 ‘모델’이 그 대상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방 욕망(Mimetic Desire)’이다.
우리의 욕망은 삼각형의 형태를 띤다. 나와 내가 원하는 물건 사이에는 늘 ‘타인’이라는 중개자가 서 있다. 우리가 SNS에서 유행하는 ‘핫플레이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 장소가 객관적으로 훌륭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내가 닮고 싶은 누군가가 그곳에서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건이나 장소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가진 그럴싸한 이미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셈이다. 이 연쇄적인 모방 속에서 ‘나’라는 주체의 고유한 목소리는 타인의 소음에 묻혀 점차 소멸해간다.
소속의 안도감과 개별성의 상실
트렌드를 따르고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행위는 본래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소속되고 싶은 본능’에서 비롯된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는 이 눈물겨운 노력은 사실 고독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기도 하다. 남들과 비슷한 것을 소유하고 비슷한 경험을 공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낀다.
문제는 이 안도감의 대가가 너무나 크다는 데 있다. 집단적인 갈망의 흐름에 몸을 맡길수록, 우리는 ‘내가 정말로 무엇을 느꼈는가’를 묻는 법을 잊어버린다. 모두가 찬사를 보내는 풍경 앞에서 나만은 지루함을 느낄 수 있고, 모두가 외면하는 낡은 골목에서 나만은 형언할 수 없는 평온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방의 감옥에 갇히면 이러한 개별적인 감각들은 ‘잘못된 것’ 혹은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어 스스로 검열당한다. 결국 우리는 타인의 취향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어, 정작 자신의 진심과는 이별하게 된다.
고유한 리듬을 회복하는 일
모방의 연쇄를 끊어내는 것은 타인을 거부하는 독선이 아니라, 내 안의 정직한 리듬을 되찾는 과정이다. 세상이 제안하는 화려한 리스트에서 잠시 눈을 돌려, 나의 감각이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에서 반응하는지 가만히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이 편안함을 느끼는 구체적인 순간들에 집중할 때 비로소 가짜 욕망의 거품은 가라앉는다. 굳이 유명한 곳이 아니어도 좋다. 나만이 아는 작은 공원의 벤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낡은 책방의 냄새처럼 소박하지만 확실한 나의 감각들이 모여 ‘나’라는 주권적인 영토를 형성한다. 타인의 지도가 아닌 나의 발자국으로 삶의 지도를 그려나갈 때,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를 흉내 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마무리하며
유행을 따르는 마음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은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외로운 몸짓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흐름 속에서 정작 나의 주체성이 실종되고 있지는 않은지 조용히 되짚어볼 뿐이다.
오늘 하루, 누군가의 추천이나 통계가 아닌 나의 순수한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내가 느끼는 즐거움은 소박할지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진실한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연기하느라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서투르더라도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세상이 정해준 ‘베스트’가 아닌, 나만의 ‘오직 하나’를 발견하는 그 순간에 진정한 자유와 주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