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내 삶의 이야기를 빼앗기지 않는 권리
우리는 흔히 축복을 '당첨된 복권'처럼 여긴다. 남보다 앞서가는 속도, 통장의 두께, 자녀의 명문대 합격 같은 것들이 축복의 척도가 된다. 세상은 이 눈에 보이는 지표들을 '복'이라 부르며, 그것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노력이 부족하거나 운이 없었다'는 라벨을 붙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축복은 가진 자에게는 오만을, 못 가진 자에게는 비굴함을 선사할 뿐이다. 신앙이 주는 진짜 유익은 이러한 세상의 채점표를 찢어버리고, 내 삶을 해석할 주권을 되찾아오는 데 있다.
성공이라는 우상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
냉정하게 말해, 세상이 말하는 축복은 대개 '운 좋은 승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누군가의 성공이 축복이라면, 그 옆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실패는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성공을 축복과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은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전락한다.
신앙이 주는 실제적인 유익은 성공이라는 우상으로부터 나를 분리하는 데서 시작된다. 축복은 외적인 조건의 플러스(+)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는 ‘내면의 단단한 상태’다. 내가 잘나갈 때나 고난 중에 있을 때나 나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 압도적인 평안이야말로 신앙이 선물하는 가장 고귀한 부유함이다.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는 '대안적인 이야기'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신앙의 핵심을 ‘대안적 공동체’에서 찾았다. 세상이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고 속삭이는 거대한 제국의 논리를 펼칠 때, 신앙은 "가진 것이 없어도 너는 충분히 존엄하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짜 축복은 이 대안적인 이야기를 내 삶의 문법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복이 아니라, 비록 낮은 곳에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명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세상이 정해준 ‘성공 공식’에 나를 끼워 맞추지 않고, 나만의 고유한 삶의 무늬를 그려나가는 용기가 바로 축복의 본질이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피어나는 품격
축복은 고난을 비껴가는 요행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이라는 시커먼 어둠 속에서도 끝내 절망에 잡아먹히지 않는 ‘담대함’에 가깝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힘, 타인의 박수가 없어도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힘은 오직 깊은 신앙의 뿌리에서만 나온다.
우리는 부족함 속에서도 타인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때 비로소 '복 있는 사람'이 된다. 결핍의 공포에 사로잡혀 움켜쥐는 삶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다는 효능감을 경험하는 것. 이 가치관의 전복이야말로 가난이나 실패라는 물리적 장벽마저 무력화시키는 신앙의 실제적인 힘이다.
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결국 축복은 세상이 줄 수도 없지만, 세상이 결코 빼앗아 갈 수도 없는 ‘영혼의 주권’이다. 세상의 복은 유통기한이 있으며, 죽음이나 불황 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영원을 응시하며 걷는 이들에게 축복은 지금 이 순간의 초라함조차 숭고한 이야기의 한 장면으로 통합해내는 실력이다.
당신의 신앙은 당신을 더 욕심 많은 사람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타인의 인정에 목매는 비참한 경쟁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주권적 평화. 그 근사한 품격을 유지하며 오늘을 살아내는 당신이야말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진짜 복을 받은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