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주문대 앞에서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꼴에 남자친구랍시고 의기양양하게 커피라도 사려는 태세였는데 서연에게는 묻지도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려 했다. 등신. 임서연은 생리 중에 커피 안 마셔. 발끈하는 목소리가 목 끝을 때렸지만 나는 따뜻한 캐모마일 두 잔을 주문하고는 테이블로 돌아섰다. 만약 그때 생리 얘기를 내뱉었다면 어땠을까. 유재현은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꺼내지 말았어야 할 말이라는 듯 얼굴을 붉혔을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생리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그럼 생리가 뭔 지부터 설명해 줬어야 하려나. 하아, 갑자기 한숨이 푹 꺼지듯 날숨으로 뱉어졌다. 도대체 서연이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좋다고 설치는 건지. 3년 짝사랑도 말이 사랑이지 그냥 누군가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좋아했던 걸지도 모른다.
마주 앉은 유재현은 테이블 위에 놓은 서연이 손을 매만지며 히죽거리고 웃었다. 원래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배시시 웃는 게 디폴트인 사람인가 싶었던 나는 이내 싸늘하게 변한 유재현을 보고나서야 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서연이가 티슈를 가지러 간 사이였다. 무슨 표정이 초기화된 사람 같았다. 맘에 안 드는 게 있냐는 물음에 나는 하마터면 너라고 말할 뻔 했다. 다행히 눈치가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아니면, 평소 나보다 훨씬 더 무례하고 빈정거리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내 노력의 결실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서로가 싫어한다는 걸 분명히 깨닫고 나서야 우리는 자리를 일어섰다.
카페에서 헤어진 뒤, 서연이를 집까지 바래다주지 못한 게 지금도 이가 갈린다. 그 자식과 멀어지는 서연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나는 공황이 온다면 이런 상태일까 생각했다. 갑자기 끔찍하게 홀로 외로웠던 시간들이 눈앞에 띄어졌다.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눈물 젖어 뭉쳐진 휴지처럼 방 모서리에 쳐 박혀 있었던 기억, 이리저리 던져져서 차이는 공처럼 여기서 맞고 저기서 터져서 맛봤던 비릿한 피 맛, 애들이 몰래 혹은 대놓고 내뱉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들. 그랬던 내 삶에 유일하게 들어온 빛이 임서연이었는데. 멀어지는 빛을 보고 있는 나는 조명 꺼진 죽은 사람 같았다. 서연이는 집에 도착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연락해주는 건 우리 둘만의 약속이었는데. 서연이가 약속을 어긴 건지 아님 이 늦은 시간까지 그 자식한테 잡혀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하나였던 우리의 모든 게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한 건 체육대회를 앞두고 나서부터였다. 학생회에서 준비해야 하는 게 많다며 유재현하고 등교하겠다고 하는 서연이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나와의 약속을 하나 둘씩 어기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유재현하고 같이 다니겠다는 통보였으니까.
“너 내 문자 피해?”
웃음기는커녕 온몸에서 피가 삭 가신 것처럼 임서연에게 물었다. 편안하고 특별했던 우리 사이의 공기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어색한 침묵으로 내려 앉아 있었다. 서연이는 그런 거 아니라며 얼버무리듯 말했지만 나는 그때도 느낄 수 있었다. 서연이가 문자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피하려고 한다는 걸. 그리고 그 느낌은 임서연이 날 차단하면서 확실한 사실이 되었다. 오지도 않는 답장을 기다리며 쌓여가는 연락이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을 때 나는 내가 차단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도무지 대화를 하고 싶어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유재현 때문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그때 즈음에 유재현이 올린 SNS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던 건 사진과 동영상에 온통 서연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연이는 SNS에 본인 얼굴을 올리는 걸 싫어한다. 모든 사진마다 서연이는 부담스러운 얼굴로 찍혀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임서연은 내가 제일 잘 안다. 서연이는 저렇게 웃지 않는다. 유재현은 수업 시간에도 종종 서연이에게 메시지를 보내고는 했다. 서연이는 화들짝 놀라서 전원을 끄곤 했는데 하루는 우연히도 어깨 너머로 사진을 보고야 말았다. 상체를 탈의한 나르시시스트가 야릇한 미소로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체 사진 보는 페티쉬 있냐. 싫음 싫다 해.”
보다 못한 내가 임서연에게 말하자, 서연이는 나를 강간범 보듯 노려보았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 빨리 발갛게 상기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 서연이는 화가 나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는데 그마저도 할 줄 아는 욕은 없었는지 씩씩거리며 네가 뭔데, 라는 말만 한없이 읊조렸다.
난 네가 전부였어, 예전의 너도 내가 전부였잖아. 내 속에서 울먹거리는 말들은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튀어나왔다. 유재현 SNS를 악플로 도배했고 노는 애들 무리한테 넌지시 나체 사진 얘기를 흘렸다. 소문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더 큰 파문으로 퍼졌고 유재현하고 드잡이까지 하고 나자 결국 임서연 입에서 절교하자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은 여태까지 때려 맞았던 그 어떤 폭력보다 더 아프고 비참했다. 나는 마치 무릎 반사처럼 본능적으로 죽을 것 같다며 매달렸다. 얼마나 절절하고 애처로웠던 건지 서연은 마지못해 차단을 풀어주었지만 거리를 갖자고 말했다. 나는 도대체 그 빌어먹을 너와 나의 거리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여전히 유재현하고는 붙어 다니면서 나한테는 거리를 말하는 서연을 보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떨 때 보면 임서연은 보란 듯이 더 유재현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게 날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정신병자 취급을 하면서 그 둘은 행복하게 웃고 떠드는 꼴을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었을 때 결국 그 일이 터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의 나는, 그리고 너는 뭔가가 씌었던 것 같다.
“야, 임서연! 너 내 말 안 들려? 어디 보는 거야.”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서연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 내 감정을 다 쏟아내며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서연은 벽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덜덜 떨고만 있었다. 그때 방안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고 서연은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혼자 거실에 남겨진 나는 어이가 없어서 쿵쾅거리며 서연을 뒤따라갔다. 서연이가 휴대폰을 귀에 붙인 순간 나는 낚아채듯 휴대폰을 뺏어서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유재현이었다. 휴대폰을 뺏으려고 달려드는 서연을 힘으로 제지한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까지 걸어 나가는 동안 눈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조심해, 지금 가고 있어, 어디야, 괜찮은 거야? 애절함을 뚝뚝 묻히고 있는 글자들을 보던 나는 임서연한테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악, 하는 비명을 고성으로 맞받아치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몸싸움까지 번졌을 때 어쩐 일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서연은 내게 멱살을 잡힌 채 베란다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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