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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Dec 23. 2021

D-4





아버지의 입원은 간이식 수술 예정일의 4일 전이었다.

수술 4일 전인 오늘 아빠는 전라남도에서 직접 4시간 반을 운전해 서울에 오셨다.

마침 내가 재택근무를 한다는 말에 아빠는 잘 됐다며 병원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 자취 집으로 오셨다. 

앞으로 약 두 달간을 서울에서 지내셔야 해서 그간에 우리 가족이 쓰고 먹을 것들을 잔뜩 차에 실어 오셨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쉴 새 없이 차에서 물건들을 내리는데 두 달 치의 겨울옷, 속옷, 수건, 양말, 담요, 이불.. 그래 그런 것 까진 괜찮은데 물 끓일 전기포트와 식기들까지 나왔을 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꺼낸 커다란 아이스박스에는 온갖 반찬과 국이 가득했는데 자세히 보니 이제 막 녹기 시작한 생선도 있었다.

그때가 시계가 막 2시를 가리키고 있을 때였다.


아침 9시에 출발한 아빠는 몹시 배가 고프다고 했다.

최근 수술 전 식단을 관리하시며 살이 더 빠져 56kg밖에 되지 않아 안 그래도 핼쑥한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아이스박스의 음식들이 상할까 봐 정리를 먼저 해야 한다며 우리 집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작은 냉장고에서 꽁꽁 언 음식들이 와르르 쏟아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틀 전 엄마가 간병할 때 싸서 다닐 음식이라고 보냈던 것들이다.

“아빠, 내가 엄마한테 더 이상 넣을 공간 없다고 말했는데..”

아빠는 그럼 이 음식을 어떡하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빠! 그냥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제발 식사부터 하세요.”

괜스레 화가 났다.

아빠는 못 미더운 표정으로 나와 아이스박스를 번갈아 보시길래

나는 냉동실에 있던 음식을 전부 바닥에 꺼내며,

“엄마가 보낸 거 빼고 다 버리고 공간 만들 테니 제발 식사먼저 하시라구요..”

그제야 아빠는 알겠다며 보온도시락에 싸서 온 밥을 허겁지겁 드셨다.


냉동실을 정리하는 내내 나는 가슴이 뜨거웠다.

이유를 모르겠다. 내 성질이 더러운 탓이다.

나의 짜증 섞인 말투에 아무 말도 않는 아빠 모습에 더 화가 났다.

평소처럼 여진이 너 아빠한테 말투가 그게 뭐냐며 한마디 하셨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그저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아빠 모습이 나는 보기 힘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짐을 다 정리한 아빠는 

이번에는 앞으로 3일간 병원에서 먹을 반찬을 따로 싸가겠다고 하셨다.

좁은 내 자취방 주방 바닥에 반찬들을 늘어놓고

담을 용기를 달라고 하시는데 나도 모르게 정말 화를 내고 말았다.

“아니 아빠, 따로 가져가실 거면 미리 말을 해두셨어야지.. 집에 용기 하나도 없어요. 얼마 전에 엄마가 보낸 음식을 넣느라 다 써버렸는데.. 하” 


아빠는 쭈뼛하며

“수술하고 나면 이제 김치나 안 익힌 음식 못 먹는다니까.. 마지막으로 조금 싸가서 먹을까 했지..”


오늘 내가 재택근무를 안 했더라면, 아빠는 차에서 저걸 하셨을까?

내가 퇴근할 때까지 저 많은 음식들이 녹는 것을 보며 얼마나 애간장을 녹였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쏟아졌다.

결국 집에 있는 반찬 몇 개를 버리고 씻어드린 용기에 약간의 반찬을 싼 아빠는 병원으로 들어갈 채비를 마치셨다.

그리고 그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 2인실이 없어요? 아.. 간호 병동이요?”

전화를 끊은 아빠는 내게 지금 입원할 수 있는 병실이 6인실 간호 병동밖에 없다고 말했다.

수술 전에 6인실에 계시게 하는 것도 신경 쓰이지만 간호 병동이라면 수술 직전까지 같이 있을 수도 없다는 말이었다.

코로나로 등록된 간병인 1인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데, 간호 병동은 간호사가 간병을 해주기 때문에 간병인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아빠는 오늘부터 수술 전까지 혼자서 식사를 하고 수술 전 처치를 받고 혼자서 주무시고.. 그렇게 수술실에 들어가셔야 하는 것이었다.


병원에 다시 전화해서 간호 병동 아닌 병실이 정말 없느냐 물었는데, 당장 입원할 수 있는 곳이 없단다. 긴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는 내게 “아빠는 괜찮아. 수술 전인데 혼자 있어도 되지”라고 말했다.


아빠는 얼마 전 아빠가 19살 때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셨다. 살아오며 아빠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사진 한 장 남겨둘 수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며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다 모르긴 하지만 아빠는 네 차례의 암 수술로 많이 지쳐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빠도 나처럼, 아프고 힘든 순간 엄마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괜찮아. 수술 전인데 혼자 있어도 되지’ 아빠의 그 말이 온전히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조금 전 이유도 알 수 없이 아빠에게 짜증을 냈던 후회의 마음까지 더해져 눈물이 핑 돌았다. 

“수술 전에 어떻게 아빠를 혼자 둬.”


한 번 입 밖으로 꺼낸 마음은 주체할 수없이 쏟아져 나와 내가 어떻게 아빠를 혼자 두냐며 몇 번을 반복해 말하다 눈물을 쏟아 버렸다.


그렇게 아빠 속을 여러 번 아프게 한 후에야 아빠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가 가신 후 나는 한참을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이해되지 않았고 걱정되고 지친 아빠의 표정들이 떠올라 한없이 슬펐다.


회사에서 진상 부리는 타부서 사람들을 친절하게 응대해 우리 부서 신입들에게 대단하단 소리를 들었던 날 떠올린다. 그런 내가 참 한심하다.. 모든 사람에게 불친절하고 못된 사람이 되더라도, 아빠에게만은 한없이 다정하고 애교 있는 딸이고 싶다. 속상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들 때, 욱한 모습이 아닌 그 마음 그대로 속상하다, 걱정된다, 아빠 힘들었겠다 말할 수 있는 딸이고 싶다. 나는 그러지 못했던 오늘의 나 자신을, 아마도 오래오래 후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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