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범한 청년의 스타트업 이야기
스타트업 붐이 일기 시작하던 2014년 처음 창업을 했다. 싸이월드를 대체한 페이스북이 유머글과 광고로 물들기 시작하던 시점, 사람들의 속 깊은 소통을 끌어내고자 만들었던 휘발성 SNS ‘MOONWRITE’. 당시 정식 출시도 안 된 서비스를 보고 카카오 팀에서 미팅을 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꽤나 시의적절한 서비스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실력 없이 의지만 충만했던 대학생들의 첫 번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실패 원인을 프로그래밍 능력 부재라 판단하여 그때부터 프로그래밍에 발을 들였고, 6개월 후 멋쟁이사자처럼 활동을 통해 프로그래밍을 직접 배워가며 서비스를 만들었다. 동시에 대치동에 나가 무작정 카페와 패스트푸드점을 찾아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2주 동안 1000개의 리뷰를 모으며 시작했던 학원정보 플랫폼 서비스 ‘강남엄마'는 100여 개 팀 중에서 1등을 하며 꽤나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호기로운 출발과는 달리 서비스는 수개월간 쉽사리 성장하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며, 취업준비를 하며 서비스를 만들던 우리였고, 그러던 때마침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던 현대자동차 연구소에서 합격통보를 받았다.
28살 끝자락. 그동안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았지만, 이번이 지나면 더 이상 취업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나를 괴롭혔고, 입사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그 불안감은 턱 끝까지 차올라 나를 압박했다. 과연 내가 교육에 뜻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은 심장을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애초에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자기 암시에 불과했다. 굳은 결심을 했지만, 굳다고 믿었던 나의 결심 따위는 입사 하루 전 날 마지막 순간 한낱 종이 쪼가리 마냥 찢겨 나갔다. 2016년 1월, 지난 2년간의 꿈을 내 스스로 묻어버린 채 회사로 도망쳤다. 나는 겁쟁이였다.
나는 스타트업 회사들을 동경한다. 정확하게는 가진 것도 변변치 않은 사람들이 모여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결국은 그것을 하나씩 이루어 나가는 그런 회사들을 말이다. 그들의 눈에서는 항상 이상하리만치 빛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무모해 보이지만 자신만의 꿈을 가진 사람들을 나는 파랑새라 부른다.
그런 내게 완성된 틀 속에 있는 대기업은 답답한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잘 적응해보고자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 보았다. 매일 아침 1시간씩 일찍 출근해 자동차강의, 엑셀공부, 독서 등등 닥치는대로 온갖 것들을 공부했다. 누군가는 ‘신입때라 그런다' ,‘잘 보이려 한다' 등등의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살았던 것은 하루 중 의미있는 시간이라고 여기는 것이 오직 그 1시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내가 회사에 남아있는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의미있는 삶’을 외치고 있었다. 결국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 입사한 지 1년 2개월 만에 조금은 급하게 회사를 떠났다. 파랑새가 되기 위해.
회사를 나오긴 했지만 역시나 당장 할 일이 없었다. 무언가 배우고 싶고 열심히 달리고 싶은데, 방향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제자리에 멈춰 있을수록 나를 초조하게 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 알바를 하기 시작했지만, 그럴수록 내 자신은 점점 더 초라해져 갔다.
불과 한두달 전까지 큰 직장을 다니다, 최저시급의 알바를 하고 있는 나이 서른의 내 모습을 본 순간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자초한 이 선택이 나를 헤어나올 수 없는 저 바닥으로 몰아넣은 것만 같았다. 가장 비참했던 순간은 '회사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라는 상상을 하고 있는 비열한 모습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토록 외치던 의미있는 삶이 대체 무엇인가를 찾아야만 했다.
내가 이 길에 빠져든 가장 큰 이유는 첫번째 창업인 MOONWRITE 때의 기억 때문이다. MOONWRITE 창업 당시, 서비스에 ‘죽고싶다' 라는 글을 남기던 여중생이 있었다. 매일같이 글을 남기기 시작한 그 학생은 점점 안정을 찾아가며 어느 날, 우리 서비스에 고맙다고 글을 남겨 주었다.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돈 한 푼 벌지 못했지만, 내가 한 일이 세상에 분명한 의미를 가지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때를 기억하고자 내 카톡 프로필 사진은 그 후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바뀌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나는 그것이 단지 창업이면 해결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방황의 과정 동안 되돌아보며 내가 원하는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고객에게 제공하고, 고객이 그것을 사용하여 굉장히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그 절실한 사용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꽤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나서야.
전환점은 생각보다 우연하게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들른 편의점에서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먹으며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이서 먹기 많은 양이지만 담소를 나누며 먹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는 숟가락 때문에 통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제로콜라가 아니면 일반 콜라는 단 한잔도 마시지 않는 나였기에 아이스크림도 멀리하는 나였다. 일부러 숟가락을 멀리 놓기도 했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한입 한입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달콤함을 놓지 못했던 그 날의 기억이 훗날 지금의 라라스윗을 시작하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중요한 순간이 생각보다 조용하게 스쳐갔다.
아이스크림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 후엔 무작정 공장을 찾아다녔다. 예상은 했지만 무작정 찾아와 신제품을 개발하겠다고 하는 놈은 어디에서도 그리 환대받지 못했다. 그렇게 몇 개의 공장을 돌아다니다 운 좋게도 한 곳에서 뜻에 공감해주신 사장님께서 도움을 주셨다. 그렇게 샘플 개발실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락받았지만 제품은 뚝닥 나오지 않았다.
회사에서 1년이면 800만대가 넘는 자동차에 들어가는 하나의 작은 부품을 담당하게 된다. 어떤 분야든 내가 만든 부품이 완성차에 적용되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만큼은 단기간에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아이스크림 또한 똑같이 접근했다.
국내에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전문정보가 거의 없어 해외에 있는 서적과 논문을 찾아서 공부했다. 읽고 실험하고 분석하고, 다시 읽고 실험하고 분석하고. 기약 없는 그 일을 수개월간 했다. 그렇게 50차례의 샘플 테스트를 넘어설 때 쯤, 비로소 첫 번째 제품이 나왔다. 그리고 정말 맛있다라는 고객평을 듣게 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재료과를 졸업해 재료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재료쟁이라 부른다. 재료쟁이가 싫었던 나는 또다시 재료쟁이가 되어 있었다.
설탕의 달콤함은 중독적이다. 지쳤을 때, 힘들 때 입안에 들어가는 달콤함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설탕이 건강에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끊지 못한다. 하지만, 사실 해로운 것은 달콤함이 아니라 설탕일 뿐이다. 그리고 설탕이 적어도 충분히 달콤할 수 있다.
국어사전을 보면 ‘달콤하다'는 말의 뜻에는 '단 맛’ 이외에, ‘편안하고 포근하다’ 라는 뜻이 있다. '달콤한 휴식'과 같은. 삶에서 ‘달콤함'이란 그런 것이다.
라라스윗은 단순히 아이스크림을 파는 회사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삶을 달콤하게, 더욱 편안하고 포근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채기도 하지만 ‘라라스윗’이라는 이름은 영화 ‘라라랜드’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영화만큼이나 잊지 못하는 영화평이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포기했던 현실. 그러나 꿈을 이루고 돌아봤을 땐 그렇게 포기했던 현실이 거꾸로 그들의 꿈이 되어 있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어쩌면, 그 과정의 영원한 반복일지도 모른다.
- watcha, 백수골방 -
꿈을 꾼다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다시 꿈을 꾸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