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받는 질문에 나는 ‘익숙한 편리함을 기대하는 것’이라 답한다. 화장실에 가면 전기가 들어오고 손 씻을 곳이 있고,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하찮게 보인다. 매일 날씨는 체감온도 40도를 웃돌고 습도 80% 이상을 기록하는 스리랑카 현장이지만 짜증보다 웃음이 훨씬 많을 수 있는 이유는 매일 만나는 코인트리 아이들의 밝고 행복한 모습 덕분이다.
코인트리 우라니 아카데미(학교) 아이들과 수건 돌리기 하기. 수건이 없어서 내 모자로 대신했는데, 아이들이 꺄르륵 웃는 모습에 나도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솔직히, ‘그날일 때’는 난이도가 좀 올라간다. 스리랑카 현장에 갈 때마다 한 달씩은 머물러서 생리 주간이 무조건 포함되는데, 이때 필요한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 있으니 바로 ‘탐폰(체내형 생리대)’이다. 탐폰 발명가는 진짜 노벨상 받으셔야 함
화장실이나 숙소에 쓰레기통이 따로 없고, 생활 쓰레기는 모아뒀다가 1~2주마다 한 번씩 태우므로 탐폰은 여러모로 일을 간단하게 만든다. 사용한 생리대를 비닐봉지에 넣어 숙소 안에 계속 둘 수도 없고, 밖에 두면 야생동물이나 벌레가 꼬이니 내다 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야자수 오른쪽 옆으로 파놓은 구덩이가 쓰레기통. 생활 쓰레기는 모아뒀다가 1-2주에 한 번씩 태운다. 쓰레기통도 쓰봉 수거함도 없으니 사용한 생리대를 버릴 수가 없다.
하루는 마침 그날이 시작되어 탐폰을 사러 갔다. 그러나 슈퍼 두세 곳을 다녀봐도 도저히 구할 수 없었다. 심지어 지역에서 가장 큰 슈퍼에서도 탐폰을 팔지 않았다. 아차, 우리 아이들이 사는 포투빌 지역은 대다수 주민이 무슬림이라 수요가 없어 안 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어떤 종교, 문화에서는 결혼 전 여성이 탐폰을 포함해 체내형 무언가를 사용하는 것은 무척 낯선 일이거나 금기시된다.)
이후부터 현장에 갈 때마다 한국에서 탐폰을 사서 챙겨가는데, 7kg 백팩 하나에 한 달치 짐을 꾸리며 탐폰까지 챙기기란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기내용 백팩 하나에 7kg 이하로 한 달치 짐 싸기. 비상약, 세면도구, 옷을 챙기면 거의 백팩이 찬다. 탐폰 박스를 해체해서 가방 빈 공간마다 하나씩 채워 넣는 게 포인트.
심지어 기내용으로 들고 타는 백팩이라 한 달간 사용할 모든 액체류는 100ml 통에 담기. 스리랑카 현장 가기 전, 집은 랩실(lab)이 되고...
스리랑카 현장 한 달씩 출장 갈 때의 모습. 랩탑까지 넣은 기내용 백팩(7kg 이하) 하나에 앞가방(슬링백) 하나면 한 달 거뜬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무더위에 히잡을 쓰는 일도 만만치 않다. 물론 외국인이나 현지 주민 중에서 힌두교, 불교, 기독교를 믿는 여성들은 히잡을 쓰지 않고, 무슬림 주민들이 히잡을 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무슬림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나 무슬림 가정을 방문할 때 웬만하면 히잡을 쓰려고 노력하는데, ‘(가정 방문할 때) 저는 당신의 종교를 존중해요’, ‘(무슬림 아이들에게) 지금껏 여자 어른 중에 히잡 쓴 사람만 봤지? 외국인인 내가 낯설겠지만, 나도 히잡 썼으니 우리 좀 더 빨리 친해지자!’라는 의미에서다.
무슬림인 공무원, 변호사, 지역의 리더를 만나러 갈 때도 전략적으로(?) 히잡을 쓴다. 보다 신뢰를 주고받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 보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코인트리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특히 무슬림 커뮤니티의 이맘(종교적 리더)과 협상을 하는 자리에서 히잡을 쓰는 건 좋은 전략이다. 이 미팅 때도 이맘이 히잡 쓴 내 모습을 칭찬하며 화기애애하게 미팅 스따뜨
‘생리하기’, ‘히잡 쓰기’는 내가 여성이라 겪는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나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 나는 현장에서 외국인이자 종교가 없는 여성이기 때문에 날씨나 환경에 따라 부착형 패드와 체내형 탐폰 중 선호하는 것을 고를 수 있고, (한국에서는 심지어 원하면 약이나 산부인과 시술 등 안전한 방법으로 생리 주기를 조절할 수도 있고) 종교적 신념, 현장의 특수성, 개인의 편의에 따라 히잡을 자유롭게 쓰고 벗을 수 있다.
코인트리 특수아동 아카데미(학교)에서 재봉 기술을 배우는 청각언어장애 여학생들. 모두 10대 후반인데, 결혼할 나이가 되어 히잡보다 더 가리는 니캅*을 입고 등하교한다.
▼ 니캅*, 히잡, 부르카, 차도르, 두파타의 차이.
Explained: the differences between the burka, niqab, hijab, chador and dupatta (ABC News: Lucy Fahe)
안타깝게도 코인트리 학교가 있는 스리랑카 포투빌 지역 무슬림 여성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거의 없다. 바로 ‘de facto’ 젠더 차별* 때문이다. 말하자면 체내형 탐폰을 사용하는 것과 히잡을 안 쓰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진 않지만, 지역 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금기시되는, 나아가 손가락질받는 일로 여겨진다.
**de jure는 젠더 차별/착취적 법이나 정책, de facto는 고정관념, 유해한 젠더 규범(예를 들어 FGM, 여성 할례)과 관행을 의미한다. de facto 차별은 생활과 문화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어 de jure 차별보다 없애기 어렵다.
코인트리 특수아동 아카데미에 다니는 10대 청각언어장애 여학생들의 모습. 교실이 너무 더워서 (여자 선생님 앞에서만) 잠시 얼굴을 가린 복면만 걷어내고 수업을 듣는다.
다만, 우리 현장의 사례로 이슬람교가 무조건 여성을 강력하게 탄압하는 종교라는 그릇된 인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된다. 실제 무함마드는 남녀가 함께 기도하며 남녀 모두 동등한 교육을 주장했고, 꾸란 16:97에는 ‘옳게 행동하는 자는 남자이건 여자이건 그가 바로 믿는 자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좋은 삶을 보장할 것이며, 우리가 그들이 행하였던 것 중 최선의 것으로 그들에게 보상할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하교하는 코인트리 특수아동 아카데미 여학생들의 모습. 등하굣길, 이동할 땐 눈만 내놓는 니캅 형태로 복면/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통학용 툭툭을 탄다.
우리 스리랑카 현장의 무슬림 여학생들은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읍내에 나가봐도 히잡을 쓰고 자전거 타는 여성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 ‘여성이라서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타면 안 된다’는 공유된 젠더 차별은 여학생들의 낮은 출석률과 교육의 기회 박탈로 이어진다.
우선 매일 학교에 통학하기 위해 툭툭 교통비를 내야 하는데 교통비를 낼 수 없는 형편의 빈민 가정이 대다수고, 근근이 교통비를 낼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그 돈을 가족의 식비나 생활비가 아닌 ‘딸의 통학 교통비’로 써야 하는 이유를 학부모들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여자 아이들은 아버지나 남자 형제가 스쿠터나 자전거로 매일 등하교를 시켜주지 않으면 학교에 다니기 어렵다.
아직 히잡을 쓰지 않은 파티마(가명)는 오빠의 자전거를 타고 코인트리 학교에 온다. 둘 다 청각언어장애가 있어서 우리 학교에 다니는데, 오빠가 결석하면 파티마도 결석한다.
나이를 불문하고 여성은 외식을 할 수 없다. 집에 손님이 와도 부엌에서 나오지 않으며 외부인과 대면하지 않는다. 남편 없이 (미혼 여성의 경우 아버지 없이) 다른 남성과 밖을 돌아다니는 건 무슬림 여성이 아니더라도 지역 사회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는 일이다.
집 밖에 나올 때 기혼 여성은 얼굴만 내놓는 ‘차도르’를, 10대 후반의 결혼을 앞둔 여학생은 두 눈만 내놓고 얼굴과 전신을 모두 가리는 검은 베일 ‘니캅'을 입는다. 장애를 가진 소녀들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폭력적이거나 생활력이 없거나 가정을 책임지지 않는 나이 많은 남성과 결혼한다. 이렇게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de facto 젠더 차별은 우리의 교육 지원 사업의 속도를 늦추거나 효과를 떨어뜨린다.
스리랑카 현장에 온 코인트리 꽃주주(후원자)님이 여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니캅 써보기에 도전하고 있다. 우리 학생이 눈썹까지 가려야 한다고 상세히 알려주는 중
(히잡, 니캅 쓴 여학생들의 얼굴은 모두 모자이크 처리했다. 우리 아이들 눈도, 얼굴도, 웃는 모습도 너무너무 예쁜데, 얼굴이 드러난 사진이 SNS나 인터넷에 올라가면 아이들이 곤란해지고 질타받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최근 들어 코인트리 직원, 선생님처럼 교육받은 지역 청년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점점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실제로 무슬림인 우리 남성 직원들은 ‘여성은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와이프가 원하면 '히잡을 쓰고 오토바이를 운전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배우자의 삶은 배우자의 것이니까. 운전하는 건 배우자의 자유다'라고 했다.
특히 우리 직원, 선생님들은 장애를 가진 여학생이 코인트리 학교에서 교육받고 기술을 배워야 하는 이유로 ‘조혼, 가정 폭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계 소득을 벌고, 살아가는 힘을 기르도록 돕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인트리 스리랑카 아루감베이 아카데미(학교)에는 '스피치 수업'이 있다. 성별 구분 없이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 의견을 자신 있게 말하는 힘을 기르는 시간이다.
2023년 말, 코인트리 아루감베이 아카데미에서 스리랑카의 '국가 장학생'이 나왔다. 아마나는 매달 12,000원의 장학금을 받고 공립학교에 다니게 됐다.
청각언어장애가 있는 10대 여학생들도 매일 등교해 재봉 기술을 열심히 배운다. 재봉사, 재봉 기술 선생님이 되어 생계비를 스스로 벌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꿈꾸며!
이런 환경에서 코인트리 스리랑카 특수아동 아카데미(Special Academy)에 다니는 청각언어장애 여학생들도 정말 용기 있고 멋지지 않은가!
체감온도 40도의 무더위에도 매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가리는 검은 ‘니캅'을 입고, 코인트리의 통학용 툭툭을 타고 우리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듣고 재봉기술을 배운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나 창문 하나 없는 교실(방)에서 부르카를 입고 연신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도 재봉틀을 보는 눈빛만큼은 다들 반짝반짝하다. 코인트리 후원자님 덕분에 선풍기 한 대를 선물해 줬는데, 정말 기뻐하며 몇 번이나 감사하다며 인사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선하다.
우리 코인트리 학교는 젠더, 종교, 인종, 계급,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지금도 그렇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다정한 학교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