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린 후라 아침 공기는 상큼하다. 라일락도 이제 꽃망울을 터트렸다.
뉴스는 아침부터 다양한 보도를 쏟아낸다. "북한 태양절 맞아 미-중 공조 견제에 핵실험 여부 저울질, 육지로 올라온 세월호 참사 3주기 하루 전 방역 후 검색 예정, 5.9 장미 대선 앞두고 후보들 견제와 비방 강도 높여..."
작년 9월 개통된 경강선 전철은 성남 판교역에서 여주역까지 11개 역이 있는데 이매(二梅)에서 타고 정개산 끝자락 동원대학 근처에 있는 신둔 도예촌 역에서 내려 친구들과 합류했다.
민족 최고의 성군 세종은 여주역 바로 전 세종대왕릉 역으로부터 약 십여 리 떨어진 영릉에 영면하고 있다. 값진 죽음은 불멸(不滅)하고 위대한 정신은 불후(不朽)하다.
시골마을 동구 밖 국도변 전철역에서 남정리 마을로 들어서서 정개산 오르는 초입을 더듬었다. 전원주택들이 산뜻하게 들어선 산자락 밑 논밭 사잇길 끝에 도요 작업장이 나왔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깨지고 일그러진 도자기 파편이 수북하게 쌓였고 인부들은 낡은 가마 옆에 새 가마 하나를 더 만드는 작업에 여념이 없다.
도자기는 장인(匠人)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주저 없이 내쳐지고 깨트려져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은 부족하고 모자라는 구석이 있을지라도 모두 다 천부인권을 누리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가마 옆 산으로 난 길을 오르다 보면 산허리를 깎아 다듬어서 낸 임도와 만난다. 능선에서 마을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휘도는 임도를 따라가면 제 구실을 잃어버린 호암 약수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급경사로 높게 난 계단길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가파른 계단길이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 온통 진달래 천지인 능선이 맞이하는데 능선길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몸에 밴 땀을 씻어준다. 솥뚜껑산 또는 소당산이라고도 불리는 해발 467미터 정개산(鼎蓋山)은 흙으로 덮인 육산이지만 그 정상은 누가 일부러 올려놓은 듯 바위로 덮여있다. 그 위에 서면 멀리 넓게 펼쳐진 이천의 들판과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천덕봉(天德峰)으로 가는 능선길 꺾이고 나자빠져 드러누운 고목들이 유난히 많다. 높은 산의 정상이나 능선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곳에서 비바람에 꺾이지 않고 버텨내기란 더욱 어려웠을 터이다.
광주시에 속하는 그 능선 왼쪽 편 가까이 또는 멀리 골프장이 서너 개 들어서 있다. 국내 골프장 수가 4백 수십 여개요 골프요금은 미국이나 태국 등 외국의 2~5배에 달한다는데 골프 열풍은 식을 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골프에 시간 돈 열정을 쏟아붓는 것을 보면 인간을 유희를 쫓는 존재, 즉 호모 루덴스로 갈파한 호이징가의 식견은 가히 탁월하다.
정개산과 달리 까까 중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천덕봉으로 오르기 전 나무 그늘을 찾아 자리를 틀고 오렌지 토마토 두유 바나나 딸기잼 샌드위치 즉석 떡국 커피 등 준비해 온 점심거리를 펼쳐놓고 허기를 달랜다.
천덕봉으로 오르는 긴 능선엔 나무가 없고 좌우가 탁 트여서 조망이 시원하다.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은 윈드재킷 속 셔츠를 흥건히 적셨던 땀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진달래는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며 폈고 이름 모를 꽃들은 그 길 곳곳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인사한다. 물 가에서 자랄법한 버들강아지 모양의 나무도 바위에 기대어 봉오리를 틔웠다.
속살을 드러낸 민머리 천덕봉과 원적산 그리고 두 봉우리를 잇는 긴 능선 길은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의 야외 세트장이다. 카메라를 들고 장쾌한 산세와 그에 어우러진 산객들의 모습을 담기에 바쁘다. 산행 방향이 서로 다른 산객들은 서로 스쳐 지나며 인사말을 건네고 서로 사진을 담아주기도 한다.
원적산(圓寂山)은 해발 564미터로 정작 주봉은 해발 634미터 높이의 천덕봉이다. 원적산 아래 영원사로 가는 길 봉우리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영원사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다.
영원사 뒤뜰로 내려서서 산신각, 유리보전, 대웅전, 명부전을 순서대로 둘러본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638년 해법(海法)이 창건했다는 이 절은 이천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1577년 사명대사가 중창했고, 경내에는 고려 문종 때 혜거 국사가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서있다.
영원사에서 계곡을 끼고 내려가는 포장길을 따라 벚꽃 가로수가 늘어섰고 벌들은 웅웅웅 꽃잔치를 벌였다. 산수유나무들이 많은 송말 1리 마을로 내려서니 구수한 그름 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다. 동네 아낙들은 집 부근 밭에서 김매기에 분주하다.
이천 시내로 가는 버스는 산수유 마을을 거쳐 도립리 종점에서 회차하여 송말리 정류장에서 우리를 태웠다. 백사리 경사리 신대리 모전리 등을 지나면서 버스는 산객 상춘객 마을 주민 외국인 노동자 등으로 빈 좌석이 없다.
경강선 전철 안에서 밀려드는 졸음과 줄다리기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 하루만큼은 '막걸리에 파전 한 접시'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강선 '세종대왕릉 역' 같이 후세 사람들이 기리고 추앙할 위대한 인물과 역사가 우리 세대에 많이 생겨나기를 염원하면서... 1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