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정해진 삶이라면, 우리는 왜 이렇게 애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따뜻해질 수 있다

by 김현영

요즘 저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생물학 및 신경과학 교수, 로버트 사폴스키(Robert Sapolsky)의 책 『Determined』를 읽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선택은 모두 유전자, 환경, 호르몬, 과거 경험, 그리고 뇌의 회로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안에 ‘의지’나 ‘자유로운 선택’ 같은 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결국 그 일을 하게끔 “될 수밖에 없었던” 생물학적 흐름의 결과일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 싶은 분들도 계실 텐데요.

사폴스키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주장을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뇌과학·유전학·심리학을 종합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글의 가장 마지막에 정리해 두겠습니다.


만약 그가 옳다면,

내가 오늘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모두 이미 정해져 있던 일이 되는 겁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드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애쓰며 살아가는 걸까?



사폴스키는 말합니다.

“당신이 내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뇌와 과거가 한 일이다.”


그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해방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묵직한 질문도 남깁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노력은 무슨 의미일까?

변화를 위한 시도는 단지 착각일까?

아이를 키우며 나 자신을 다잡고, 상처받은 기억을 넘어서려 애쓰는 이 수많은 몸부림들은

모두 무의미한 걸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명상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명상은 ‘통제’가 아니라 ‘알아차림’입니다.

무언가를 바꾸려는 의도보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삶이 정말 정해진 흐름이라면,

우리는 그 흐름을 알아차리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아이에게 짜증을 내는 순간이 왔다고 가정해 보죠.

그 감정을 억누르려 하기보다,

“아, 지금 내가 짜증을 내고 있구나.”

하고 바라보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자각’ 또한 하나의 정해진 반응일지라도,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응답일지도 모릅니다.



사폴스키는 인간의 도덕과 책임에 대한 기존의 개념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했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생물학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법적 처벌이나 도덕적 비난보다,

연민과 이해의 틀로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제안합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는 벌보다 연민을 선택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용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인간 행동을 이루는 복잡한 인과를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태도, 깊은 연민의 윤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 아이의 성장을 조급해하지 않고,

• 배우자의 반응을 판단하지 않고,

• 그냥 “이렇게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바라봐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결정된 삶을 가장 따뜻하게 살아내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정해진 삶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길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때로는 안타까워하며 바라봐줄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이 말은 용서의 기술이 아니라,

깊은 이해에서 나오는 연민의 태도입니다.


내가 내 아이를 키우는 방식,

부모가 나를 키운 방식,

그 모든 것도 이미 정해진 뇌의 흐름이었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그 흐름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서 조금 더 따뜻해지는 것.



사폴스키의 말처럼, 삶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과정을 조금 더 온전하게 바라보고,

덜 휘둘리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존재들의 길 또한 그 나름의 이유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자유의지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에겐 연민이 있습니다.


그 연민이,

이 결정된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살아가게 하고,

내 삶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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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폴스키가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


1. 유전자(genetics)의 결정력

• 기질, 성격, 정서 안정성 등은 강한 유전적 영향을 받습니다.

• 사폴스키는 “오랜 동물 실험과 인간 연구들이 성격과 반응성이 DNA에 깊이 뿌리 박혀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합니다.


2. 태내·환경의 각인(effect of environment & experience)

• 태아기 스트레스, 어린 시절의 양육 방식과 경험이 뇌 발달과 감정 조절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 예를 들어, “엄마의 스트레스로 인한 코르티솔이 태아 뇌를 마리네이드 하듯 둘러싸, 성인이 돼서 우울과 불안에 취약해진다”라고 설명하죠.


3. 뇌 회로의 무의식적 작동(neuroscience)

• 우리가 ‘의식적으로 결정했다’고 느낄 때, 실제로는 뇌의 비의식적 준비 활동이 먼저 시작됩니다.

• 대표적인 실험으로 Libet의 ‘readiness potential’ 연구처럼, 뇌 활성화가 의식적 의도보다 약 0.5초 이상 앞서는 것이 확인되죠.


4. 호르몬·신경 화학(neurochemistry)의 영향

• 혈당, 피로, 음주, 스트레스 호르몬 등 신체 상태에 따라 우리의 판단력과 자제력은 즉시 흔들립니다.

• 사폴스키는 이를 통해 “이런 요인들이 의식적 결정보다 훨씬 먼저 작동한다”라고 말합니다.


5. 다학제적 인과연쇄 접근(interdisciplinary causality)

• 사폴스키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유의지라 부르는 것은

유전자 → 뇌회로 → 호르몬 → 뇌활성 → 의식 경험으로 이어지는 인과 사슬의 끝부분”이라고 지적하고, 이 사슬 어디에도 ‘진정한 자유’의 지점은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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