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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pr 21. 2022

고양이 신부전 간병기6-가족

요다 제 35화

2021년 11월 17일 수요일 <가족>

아침에 요다와 산책하는데 아랫집 할머니가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했다. 

“저번에 총각이 어디 갔다 오냐니까 괭이가 콩팥이 아파서 약 사러 갔다 온다 그러는데 괭이가 콩팥이 아픈지 어떻게 안디야?”

“병원에서 검사받았어요.”

“병원에서 고양이가 콩팥 아픈 걸 알 수 있어?”

“예, 동물병원이요.”     

저녁에 요다와 산책하는데 또 아랫집 할머니가 지나갔다.

“괭이가 상전이네. 괭이가 상전이야.” 

“모시느라고 힘들어요.”

“부모를 저렇게 모셨으면 효자 소리를 듣겄네. 괭이가 상전이야요.”

할머니는 ‘괭이가 상전이야요’를 노랫가락에 실어 흥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면 칭송받지만, 고양이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면 비웃음 산다. 내가 할머니의 비웃음에 고양이를 모시느라고 힘들다며 맞장구친 건, 내 비록 고양이를 모시고 다니긴 해도 그런 짓이 우스꽝스러운 줄은 아는, 할머니와 같은 상식을 지닌 사람이란 걸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와 같은 연배로 내가 초등학생이던 70년대에 나만 한 아이들을 줄줄이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가정에 전통적 위계가 살아 있어서 집안에서 아버지가 제일 높고 그 아래가 어머니나 아들, 그 아래가 딸, 맨 아래에 개 고양이가 위치했다. 어느 사회에서나 위계는 먹이 앞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밥 먹을 때면 아버지가 제일 상석에 앉았고 아버지가 먼저 젓가락을 든 뒤에야 나머지 사람들이 젓가락을 들 수 있었다. 아버지 국그릇엔 더 많은 고기가 담겼고 조기 같은 귀한 음식은 아버지 앞에 놓였다. 아버지 다음으로는 아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딸은 눈치껏 귀한 음식을 피해 젓가락질을 해야 했고 어머니는 상을 물린 뒤 남은 음식을 먹었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음식은 개 고양이의 몫이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된 그 질서는 나의 무의식 깊이 각인됐다.      


그 시절에도 개를 집안에서 키우면서 개에게 옷을 입히고 끼니마다 고기를 먹이는 부잣집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 집을 여간 못마땅해하지 않았는데, 자고로 개는 밖에서 키워야 한다면서 개를 집안에 들이는 걸 비난했고, 사람도 못 먹는 고기를 개에게 먹이는 것에 분개했으며, 개에게 옷을 입힌 걸 보고는 별 우스운 짓을 다 한다며 조롱했다. 요즘은 부잣집이건 가난한 집이건 할 것 없이 동물을 집안에서 키우면서 끼니마다 고기를 먹이고 옷을 입혀 데리고 다닌다. 나도 예외가 아닌데, 나는 그런 짓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짓을 비난하던 어른들의 목소리가 내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다. 요즘은 동물을 밖에서 키우고 싶어도 마당이 없어 그럴 수가 없고, 옷을 입히는 건 예쁘게 꾸미려는 게 아니라 날이 추워서이며, 고기는 값비싼 생고기가 아니라 건사료를 먹이는데 건사료는 값이 정말 싸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요다 병원비로 요다 드레스룸을 차려주고 매끼 한우를 먹이고도 남을 돈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요다가 아프기 전까지 나는 동물을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비싼 병원비를 쓰는 이들을 못마땅해했다. ‘나 때는 말이야’라면서 나 어릴 적을 기준 삼았고 그때가 자연스러웠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그때는 동물이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저절로 나으면 사는 거고 아니면 며칠 앓다가 죽었다. 그런데 그때는 동물만 병원에 안 가는 게 아니라 사람도 병원에 잘 안 갔다. 특히 노인들은 고집스럽게 병원에 안 갔는데, 이가 빠지면 잇몸으로 살고 뼈가 부러지면 저절로 붙을 때까지 기다리고 중병에 걸리면 참다 죽었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도 오십이 훌쩍 넘었지만, 그때의 노인들처럼 사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다. 작년에 나는 낙상으로 98회나 병원치료를 받았다. 요즘은 건물 하나마다 병원 간판이 서너 개씩 붙어 있을 만큼 병원이 흔해졌고 의료기술이 발달한 데다 건강보험이 잘돼있어 아픈 걸 참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요다가 아프니 자연스럽게 병원에 데려가게 됐고, 의사가 권하는 치료를 받게 됐다. 동물은 보험 적용이 안 돼서 병원비가 비쌌지만, 그 돈을 어디에 쓴 들 요다를 치료하는 것보다 가치 있게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같이 사는 동물을 가족이라고 하는 걸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 위선적으로 들렸는데, 그들이 동물을 진짜로 가족처럼 아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그러니까 남도 그런 줄 안 것이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긴 해도 동물을 위해 내 걸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요다가 아프자 나는 아침잠을 안 자고 일어나 요다에게 밥을 먹이고 주사를 놓게 됐고, 하루에 몇 번이나 하던 일을 중단하고 요다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으며, 요다의 병원비를 아끼지 않고 치료를 받았다. 요다를 위해 포기해본 적 없던 걸 포기하고 내가 할 수 없다고 여겨왔던 것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요다가 가족이란 걸 느꼈다. 애니메이션 영화 ‘아빠가 필요해’가 떠올랐다. 소설 쓰는 늑대가 영희라는 아이와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였다. 우리는 가족을 혈연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혈연을 벗어난 또 다른 가족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영화에서 제시되는 가족의 모습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여겼다. 같은 사람이라도 피가 섞이거나 결혼을 해야만 가족이 될 수 있는 법인데, 사람과 동물이 가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야말로 가족을 혈연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제 보니 요다와 내가 바로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가족이 아닌가. 


요즘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요다 밥부터 먹인다. 숟가락을 든 채 요다가 음식을 삼키길 기다리고 있노라면 내 안에 사는 오래된 목소리가 무슨 우스꽝스러운 짓이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나는 변명하지 않고 맞받아친다. 우스꽝스럽기로 치면 70년대에 아버지와 아들을 떠받들던 식탁 풍경이 덜하지 않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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