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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Oct 28. 2023

초대

버스 도착 알림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272 옆에 도착예정시간 대신 ‘우회’라는 빨간 글자가 떴다. 우회라니 무슨 일일까? 알고 보니 국군의 날 행사로 광화문을 지나는 버스가 안 다녔다. 종일 비가 부슬부슬 오는 데다 몸이 무거워 그렇지 않아도 연희동까지 가기 싫었는데 핑계 김에 못 간다고 하려고 L에게 전화를 걸었다. 

“버스 타려고 나왔는데 광화문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해가지고 버스가 안 다녀요.”

“어딘데?”

“혜화.”

“그렇구나. 전철 타고 경복궁역까지 와서 거기서 272를 타면 좋을 텐데.”

“272가 안 다닌다니까.”

“그쪽에는 안 와도 경복궁 역 쪽에는 올 텐데.”

“그럴 수도 있지만, 어디서 우회한다는 건지 알 수가 있나.”

“내가 알아. 광화문이 막히면 경복궁역에서 우회해. 광화문 집회 갔다 올 때마다 거기서 272 타고 오거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돼.”

“여기서 경복궁역 가려면 4호선 타고 충무로까지 가서 3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니까 5시까지 못 가.”

그때 시간이 4시 27분이었다. 

“그럼 5시에 나 먼저 갔다 오든가.” 

“거기 나 혼자 가라고?”

“도착하면 내가 또 갈게.”

“또 간다고?”

“가까우니까 산책 삼아 가지.”

“아니야. 나도 주소 받았으니까 거기 갔다가 소네마리로 갈게요.” 

전화를 끊었다. 전시에 참여한다고 한 게 여간 후회스럽지 않았다. 


한 달 전 L이 소네마리에서 준비 중인 전시 얘기를 했다. 전시 컨셉이 흥미롭다면서 관람객이 작가의 집을 방문해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라 전시장에 가져다 설치하는 전시라고 했다. 


장대초 단하나만 옴겨주새요

꽊빈집-원룸-일방-방하나-저는이고새이찌아늘꺼애요……’ 


홈페이지에서 전시 소개 글을 본 기억이 났다.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고 띄어쓰기를 안 하고 순서를 거꾸로 쓴 글은 읽어도 의미가 들어오지 않았다. 여러 번 읽어가며 의미를 헤아리기 귀찮고 괜한 말장난에 응하고 싶지 않아서 읽다 말았는데, L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 날짜와 시간을 예약하면 작가가 없는 시간에 집을 방문할 수 있다면서 L이 그 집에 같이 가자고 했다. 거절하기 그렇고, 모르는 사람의 집에 그것도 주인이 없는 시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솔깃하기도 했다.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 방문 날짜를 예약했고 답장으로 주소와 방 비밀번호를 받았다. 연희동 940-59 506호. 23640* 그날이 방문을 예약한 날이었다. 


연희동에 어떻게 가야 할까? 횡단보도를 건넜다. 어차피 늦은 거 출발 전에 밥을 먹기로 했다. 근처 중국집에 갔다.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쌀국수집에 갔다. 거기도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가는 비가 밀가루처럼 흩날려 우산을 썼는데도 옷이 축축해졌다.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다. 김치찌개를 시켜서 먹는데 익숙한 행진곡풍의 음악이 들려서 보니 티브이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중계했다. “잘 하네. 잘 해.”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티브이를 보다가 주방 쪽에 소리쳤다. 


식당에서 나오니 5시 10분. 행사가 5시에 끝난다고 했는데 272는 여전히 우회 중이었다. L의 말 대로 전철을 타는 게 나을까. 그러나 전철역까지는 좀 걸어야 했고 전철을 갈아타기도 귀찮았다. 전광판을 보니 광화문을 사직로 쪽으로 지나는 버스는 안 다녀도 종로 쪽으로 지나는 버스는 다녔다. 종로를 지나 충정로를 거쳐 연희동에 가기로 하고 충정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탈 때는 길이 안 막혔는데 한 정거장도 못 가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경로를 조정해 종로 3가에 내려 3호선으로 갈아타기로 했다. 그런데 종로 5가부터 길이 뚫리며 속도를 냈다. 그대로라면 전철로 갈아탈 이유가 없어서 종로 3가에 내리지 않았더니 종로 1가부터 다시 길이 막혔다. 멈춰서 있는 차 안에서 뿌연 창밖으로 우비를 입은 경찰들이 교통정리 하는 걸 쳐다보는데 진동벨이 울렸다. 


“그 집에 와있는데, 여기 너무 편안하고 좋다.”

L이었다.

“너무 예쁘고 좋네. 지금 책 읽고 있어 여기 앉아서.”

“나는 가고 있는데 차가 막혀. 6시 넘었다고 그 집에 못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작가가 공지한 집 방문 시간은 6시까지였다.

“그런 건 아닐 거 같아.”

“알았어요. 좀 있다 봐요.”


종로 1가에서 충정로까지 네 정거장을 가는데 20분이 걸렸다. 버스가 안 다니는 걸 알았을 때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게 후회 막심했다. 집에 돌아가는 게 제일 나았겠지만, 부득이 연희동에 갈 거라면 전철을 탔어야 했다. 그때라도 전철을 탔어야 했다. 그러나 충정로에 가까워지며 버스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나는 충정로에서 전철이 아니라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가 국군의 날 행사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버스는 한 정거장을 못 가고 멈춰 섰다. 비가 오는 데다 퇴근 시간이었다. “이대역, 신촌 아트레온, 연세로, 연세대앞, 서대문 우체국. 몇 정거장 안 되네요.” 내 뒷자리의 남자가 일어나 버스에 붙어있는 버스노선표를 보며 통화했다. 서대문 우체국이라면 나와 내리는 곳이 같았다. “얼마 안 걸릴 거 같으니까 좀만 기다려주세요 대표님.” 그러나 버스는 지치도록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아빠가 길이 막혀서 그러니까 학원 앞에 있지 말고 안에 들어가 있어.” “도착하려면 2-30분쯤 걸릴 거 같은데, 주문을 미리 하는 게 나을까요?” 버스 안 여기저기서 약속시간에 늦은 이들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다 서다 하던 버스는 연세로에 접어들면서 아주 멈춰 섰다. 차선이 하나밖에 없는 도로라 앞 버스에 시야가 가로막혀서 도로상황을 알 수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6시 반. 뒷자리 남자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버스 안에서 악을 쓰며 발광하는 상상을 했다. “한 시간째 이러고 있는 거야.” 누가 꽥 소리를 질러서 쳐다보니 버스 기사가 창문 너머로 마주오는 동료 기사에게 하는 말이었다. 버스가 꼼짝 않고 서있는 동안 인도의 행인들은 버스를 지나쳐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기사님, 여기서 내려도 될까요?” 승객이 말하자 기사가 앞문을 열어줬다. 두 정거장 남았는데 여기서 내리는 게 나을까? 망설이다 다른 승객들을 따라 내렸다.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데, 내가 내린 버스가 횡단보도를 지나 빠르게 달려갔다.


길 찾기 앱으로 경로를 재탐색했다. 목적지 제일 가까이까지 가는 03번 마을버스를 타기로 했다. 두 개의 횡단보도를 지나 도착한 마을버스 정류장에는 정류장 가득 선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선표를 확인해 보니 03번은 내가 방금 지나온 병목구간 연세로를 지나는 노선이었고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버스는 초만원이었다. 운전사가 다음 차를 타라고 만류했지만,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차에 올라탔다.


연희 3거리에 내렸을 때는 해가 떨어져 어두웠다. 7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7시부터 소네마리에서 작가와의 대화가 있었지만 늦더라도 작가의 집에 갔다 가기로 했다. 지도 앱을 나침반 삼아 들고 빌라가 이어지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자 나침반 바늘이 회색 빌라를 가리켰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일까. 그런데 현관에 도어락이 있었다. 메일을 확인했다. 방 비밀번호만 적혀 있었다. 그 번호를 눌렀지만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주소를 재검색한 뒤 지도를 최대 크기로 확대했다. 나침반이 나의 움직임을 따라 도착지 근처를 우왕좌왕했다. 나침반을 따라 제 자리를 맴돌다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건물을 발견했다.


어두운 현관에는 도어락이 없었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5층에 내리니 여관복도 같은 복도가 나타났다. 양팔을 벌리면 벽이 손에 닿는 좁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방문이 다닥다닥 이어졌다. 503, 504, 505, 506. 비밀번호를 누르자 띠리릭 소리와 함께 잠금이 해제됐다.


문을 열었다. 불이 켜진, 집보다는 방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작은 공간이 나를 맞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마자 탁자에 가지런히 진열된 실패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크기와 모양의 실패에 색색의 실이 감겨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따라가는 지도 모르면서 거기까지 갔는데 실을 보는 순간 내가 그것을 따라 거기에 이르렀다는 걸 이해했다. 나는 막 미로를 빠져나온 것이다. 


아리에드네의 방은 색색의 실로 가득했다. 


‘단하나만 옴겨주새요’ 


나는 빨간 실이 감긴 실패를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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