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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영 변호사 Aug 10. 2024

변호사에게 남는 것은 사건뿐이다.

어느 검사실의 풍경


밤새 변호인의견서를 썼다. 날이 밝은 대로 경찰서에 가져가야 하는데 직원의 출근을 기다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 직접 두꺼운 의견서를 끈철해야 했다.


오랜만에 서류 끈철을 직접 하고 있노라니 어느 검사실의 풍경이 떠올랐다. 사법연수원 2년 차 마지막 학기 실무수습으로 갔던 검찰청이었다.


하루는 옆 자리 계장님께서 멋쩍게 웃으시며 "제가 가르쳐드릴 건 없고 기록 끈철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실제로 계장님의 서류 끈철 솜씨는 기가 막혔고, 나는 옆에서 수십 번 끈을 묶었다 풀며 계장님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그 시절 계장님의 수제자는 수년이 지나 개업 변호사가 되었고, 의견서를 끈철하며 그날을 떠올렸다. 계장님의 너털웃음과 검사님의 기록 넘기는 소리, 그리고 검사실 특유의 그 적막한 공기를 말이다.


어느덧 7년 차 변호사가 된 내게 7년 전 검사실의 풍경은 내가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추억이다. 변호사가 된 이후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딱히 답할 것이 없다.


물론 그 사이에 개업을 하고 결혼, 출산을 하는 등 개인적으로 큰 이벤트들이 많았지만, 하루하루 바삐 살다 보니 '추억', '기억'이라는 단어와는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러나 이전에 맡았던 사건의 의뢰인 이름 석자를 듣는 순간, 사건 내용과 경과가 그림처럼 스쳐간다.


언젠가 내가 수행했던 사건 목록을 쭉 훑어보며, 오랜만에 보는 의뢰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짚으며 추억에 잠긴 나를 보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남들은 사진이나 일기장을 보면서 추억에 잠기는데, 변호사는 사건 목록을 보면서 추억에 잠긴다.


어떤 사건은 나를 웃게 하고, 어떤 사건은 내 속을 쓰리게 한다. 어떤 사건은 게 승부욕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사건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반면교사의 교훈을 남기기도 한다.


가끔은 사건 때문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때로는 가 몸이라도 다쳐 사건처리를 못할까 봐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변호사가 된 이후 모든 추억과 희로애락이 사건에 담겨있다.


'변호사에게 남는 것은 사건뿐이다.'

그것을 받아들인 내가 이제 조금 변호사다워졌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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