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국내에 단체 인도 여행 붐이 일었던 2005년 12월에 필자는 10여명의 단체 배낭 여행객들을 이끌고 한 달간 인도 여행을 인솔하였던 적이 있었다(이미 인도 배낭 여행 경험이 있었던 나는, 군대 제대 후에 또 다시 인도 여행을 가고 싶었고, 여행사를 통해 인도 단체 배낭 여행의 인솔자로 가게 되면 인도를 공짜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복학 직후 겨울방학 기간 동안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하였던 것이다).
2005년 12월 31일에 우리는 '아그라'라는 도시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길가에서 '버팔로 우유'를 솥뚜껑 같은 것으로 따뜻하게 뎁혀서 팔고 있었고, 일행 중 몇 명은 그 고소한 냄새를 참지 못하고 위 버팔로 우유를 사먹게 되었다(난 인솔자로서 일행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였기에, 혹시 모를 배탈을 방지하고자 사먹지 않았고, 일행들에게도 '주의'를 주었으나 그 중 일부는 위와 같이 사먹게 된 것이었다).
위 버팔로 우유를 사먹은 사람들은 그 직후부터 설사와 복통 등의 전형적인 배탈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특히 한 여대생의 증상이 심각하였고, 결국 그 여대생은 그 날 밤 인도 현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증상이 심각하지 않았고 곧 쾌차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하필 그 날은 2005년의 마지막 날이었고, 우리 일행들은 그날 연말 파티를 하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위 여대생이 현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차마 여대생 혼자 인도 현지 병원에 보낼 수 없어서 인솔자인 나도 연말 파티를 뒤로 하고 위 여대생과 함께 병원에 갔다.
응급 처치를 끝낸 후, 담당 의사는 하루 정도 입원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결국 나는 2005년의 마지막 날 밤을 위 여대생의 병상 옆 의자에 앉아 밤새 병상을 지키며 보내게 되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위 여대생(이하 '동생')은 8체질의학을 하는 한의사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결혼식에도 갔었다), 아들도 출산하게 되었다(돌잔치에도 갔었다).
2. 그런데 올해 2월경 갑자기 위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작년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남편의 한의원으로 행정조사를 나왔었는데, 잘 해결이 된 줄로만 알고 있었던 위 조사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결국 남편과 동료 한의사를 의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수사의뢰를 하게 되었고, 관할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문을 받으러 오라고 동료 한의사에게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동료 한의사를 먼저 조사한 후에, 동생의 남편을 피의자로 소환하여 조사하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무서워 죽겠다며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문자 그대로(literally) 다른 바쁜 '만사'를 제쳐두고 위 사건의 방어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위와 같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수사의뢰 내지 고발에 의해 의료법 위반 수사가 시작되면, 거의 예외 없이 기소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양형도 적게는 집행유예에서 실형까지 선고가 되며, 더욱이 지금까지 지급된 건강보험급여도 전액 환수 조치되고 향후 지급될 건강보험급여도 지급보류가 되며, 설상가상으로 면허까지 취소가 되는 것이 통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저녁 8시(한의원 진료가 끝난 후)부터 시작되었던 첫 미팅에서, 왜 이것이 문제가 되게 되었는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하여 있고, 우리가 이 사건에서 가야할 지점은 어디인지 등을 소상히 설명하였고, 무엇보다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는 동생 부부와 동료 한의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위로해 주고자 노력하였다.
불안한 마음에, 자신들이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무엇을 해야 하냐고 계속 묻는 동생 부부에게 '이 사건에 대한 변론은 나에게 모두 맡기고, 마치 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자녀들과 행복한 일상을 보내라'고 당부하였다.
3. 내가 위 사건 방어 준비를 하면서 가장 크게 주안점을 두었던 것은 의견서 작성이었고, 그 다음이 첫 번째 피의자 신문을 대비한 예상신문사항의 작성이었는데, 나는 위 사건의 특성상 피의자 신문 전에 의견서를 미리 담당 수사관에게 제출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사건 수임 직후부터 의견서 작성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나는 서면(특히 형사 사건에서의 의견서나 변론요지서는 더욱 그러하다)을 작성할 때, 작성이 완료된 서면을 제출할지 말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나만의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작성한 서면을 스스로 읽어보았을 때 일단 나부터 설득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쓴 서면으로 나조차도 설득할 수 없는데, 다른 누구를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내가 쓴 서면으로 일단 나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면(물론 이 때의 나는 수사 단계에서는 수사관 내지 검사의 입장, 재판인 경우에는 철저히 법관의 입장에 서 있는 객관적인 제3자로서의 '나'이다), 내 경험상 거의 대부분 다른 사람(수사관, 검사, 판사 등)도 설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는 평소에도 내가 변호사로서 일을 함에 있어서 절대 타협하지 않는 기준인데, 위 사건에서는 이 기준을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였고(그만큼 어려운 사건이었고,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필요한 사건이었다), 내가 의견서를 읽어보았을 때 나를 설득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내가 100%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였다.
마치 금광석이 오랜 시간 동안의 연단을 거쳐 정금으로 나아오듯이, 마침내 위 의견서도 정금과 같이 내가 100%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완성이 되었고, 첫 피의자 신문을 일주일여 앞둔 시점에 위 의견서를 담당 수사관에게 인편으로 직접 제출을 하였다.
4. 의견서 제출 직후부터 피의자 예상신문사항 작성에 몰두를 하였고(이 때는 거의 '수사관'으로 빙의가 되어야 한다), 수능을 대비한 완벽한 모의고사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실제 신문사항이 예상신문사항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도록 촘촘하고도 빠짐없게 예상신문사항을 완성하였다.
드디어 동료 한의사에 대한 첫 피의자 신문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나는 피의자 신문 전에 수사관이 위 의견서를 읽고 왔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수사관에게 약 일주일 전에 제출한 의견서를 보셨냐고 물어보았는데, 수사관이 웃으면서 "네 변호사님 잘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웬만해선 이런 말 안하는데, 정말 오늘 조사를 하지 말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잘 작성을 하셨더라고요. 오늘 조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정말 조사를 안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피의자가 내 옆에 동석하여 있는 상황에서.
그 후 피의자 신문이 진행되었는데, 내가 작성한 예상신문사항의 범위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고, 질문 순서까지 예상신문사항의 그것과 흡사하였다.
난생 처음 피의자 조사를 받아 본 동료 한의사는 위 예상신문사항 덕분에 진술을 잘 할 수 있었고, 뒤로 갈수록 더욱 더 진술을 잘 하였다.
조사 중간에 수사관이 피의자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한 자료 확인 요청을 변호인인 나에게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신빙성을 극도로 높이기 위해, 일부러 수사관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사무실 직원에게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하였고, 실시간으로 해당 자료의 명칭과 그 내용을 생중계 하였다.
위 지점은 일종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고, 수사관은 위 터닝 포인트 이후부터 피의자가 하는 진술을 이전처럼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5. 이윽고 첫 피의자 신문이 마무리 되었고, 나는 다음 피의자(동생 남편 한의사) 신문 일정을 담당 수사관과 조율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담당 수사관이 먼저 나에게 "나머지 피의자에 대한 조사는 일단 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계좌조회 및 제가 변호사님께 제출을 요청드린 자료를 검토해본 후에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면 그 때 그 나머지 피의자에 대한 조사 일정을 변호사님과 조율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후 나는 서둘러 두 차례에 걸쳐서 추가 자료 및 의견서를 제출하였고, 위 추가 자료 및 의견서가 제출이 될 때마다 수사관의 심증이 무혐의로 점점 더 기우는 것을 수사관과의 통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머지 피의자에 대한 조사는 생략을 한 채, 두 피의자의 모든 혐의에 대하여 혐의없음 불송치결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6. 기적과도 같은 위 소식을 가장 먼저 동생의 남편에게 알려주었고, 그 원장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울먹이며 감격하였다. 나는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인 신앙을 자녀들에게 잘 물려줄 수 있는 원장님 가정이 되길 축복한다"고 말하였다.
위 원장님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곧 이어서 동생이 울면서 전화가 왔는데, 이 사건이 무혐의로 종결이 되면 꼭 나에게 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게 뭐냐고 하니까 "오베이~"라고 하였다.
오베이는 힌디(인도 말)로 우리 말로 치면 누군가를 부를 때 쓰는 "어이~" 정도 되는 말이다. 그만큼 친근한 사이여야 쓸 수 있는 말이고, 위 동생은 인도 여행할 당시 내가 가르쳐준 힌디인 "오베이"가 입에 착착 붙었는지 여행 내도록 "오베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였고, 그 까닭에 위 여행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위 동생은 내 휴대폰에 "오베이 OO"으로 이름이 저장되어 있다.
7. 위 사건은 내가 이전에도 글로 밝힌 바 있듯이, 부디 피할 길을 내어주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변론을 하였던 사건이다.
부모님께도 기도 부탁을 하였고, 교회 사람들에게도 기도 부탁을 하였다. 위 사건 변론을 하는 내내 위 기도 제목이 최우선순위였고, 기도할 때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위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동생 부부와 동료한의사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동일한 기도제목으로 기도를 할 것을 권유하였다.
나는 안다. 위 결과가 하나님의 기도 응답임을.
내가 그 응답의 과정에 도구로 쓰일 수 있었음에,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위로자격증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였던 동생 부부와 동료 한의사를 위로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다.
위 두 분의 원장님이 앞으로 더욱 더 8체질 의술을 잘 펼치고 수 많은 환자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여 주시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