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업 3년차가 되니 달라진 관점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전에는 이런 말 하는 사람들 다 자기 연봉 낮은 거 합리화 하느라고 이런 말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연차가 쌓이고 포지션이 올라가고 연봉이 올라가고 보니, 정말 내가 한푼 두푼 연연하고 살았던 것이 사실은 그리 big of a deal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연봉 몇천유로 몇만유로 더 받는다고 해서 내 인생이,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고, 내 삶을 정말 달라지게 만드는 건 사실 회사 밖의 삶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회사에 얼마나 매여 살아야하는지가, 일이 내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오히려 회사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연봉, 물론 중요하다. 정말 중요하긴 함. 그래서 지금도 연봉이 낮은 회사로 이직을 하진 않을거다.
하지만 이게 정말 깜짝 놀라 뒤집어 질 정도의 인상이 아니라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의 큰 차이가 아니라면 결국 도찐이 개찐이다. 연봉이라는 요소는 직업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대부분의 요소들이 그러하듯 연봉도 plateau가 존재한다. 어느 순간까지는 비례할 수 있어도, 일정 수준을 지나고나면 만족도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럼 연봉 외에 내 직업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엔 뭐가 있을까?
1. 인간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부분일텐데, 회사에 진짜 뭐같은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연봉이 높고 아무리 포지션이 좋고 아무리 일이 재밌고 아무리 대단한 회사여도 다 쓸모 없다. 내 정신 건강을 한순간에 시궁창으로 메다 꽂을 수 있는게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조직문화가 어떤지가 정말 정말 정말 중요하다. 회사에 toxic한 사람이 있는지, 쓸데없이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지, 그냥 인성 자체가 글러먹은 사람이 있는지 등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criterion이 됐다. 사람은 제각각 다 다르고, 나랑 성향이 맞는 사람이 있다면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고, 이건 사실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냥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하는게 인생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 회사가 지상낙원이어서 동료들이 다 하나같이 너무너무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도 여럿과 갈등을 겪었고, 누군가와는 감정이 상할정도로 싸우기도 했고, 절대 친구는 못되겠다 싶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회사에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적다라고 느끼는 이유는 이 회사에서 "norm"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toxicity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stressful한 상황에서 감정적일 수 있고, 개개인 모두 일을 하기 위해 모였지만 다 자기의 삶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기에 내 삶의 up and down을 완전히 칼로 무 자르듯 싹 잘라내고 출근할 수가 없다. 우리 회사에서는 이런 것들이 이해되고 용납된다. 하지만 그냥 자기의 misery를 남에게 project하거나, 남에게 의도적으로 못되게 행동을 하거나, 이간질을 하거나, 팀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분위기를 망치는 것과 같은 그냥 "못된 행동들"에 대한 관용은 없다.
예전에 중소기업 구인공고에서 "가족같은 기업"이고 표현한 걸 (가) 족같은 기업이라고 비꼰 meme을 본 적이 있었다. 난 이걸 보면서 회사는 가족이 될 수 없다고 줄곧 믿어왔지만, 이 회사를 다니면서 이런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우리 회사 사람들이 정말 가족 같다고 느낀다. 내가 집에서 8000km 떨어진 이 땅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걸 사람 top 10 중 8할이 회사사람들이다.
2. 안정성
전에는 테크 스타트업을 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웠더랬다. 우리 회사는 스타트업이라고 부르기엔 이제 조금 규모가 커지기도 했고, 역사도 꽤 오래된 편이라 스타트업이라는 말과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스타트업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 스타트업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게 많이 아쉬웠다. 나라마다 대도시에 있는, found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스타트업들을 보면 대개 뭔가 애자일하고, 테크놀로지로 범벅이 된 것 같고, 사무실도 트랜디하고 그런데, 나는 우리 회사가 이런 느낌이 아닌 것이 싫었었다. 회사가 갑자기 급속도로 성장을 하면서 인원을 많이 채용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사무실이 비좁아져 이제 새로 이사할 부지를 물색하고 있는데, 그 이사하는 과정도 이 회사에서는 몇년째 진행중이라는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빨리 빨리 하면 안되나? 그럴 돈이 없나?
그런데 얼마전 내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바이오텍 스타트업들을 다니던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냥 별 생각없이 how are you? 라고 했는데, really really bad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일이냐고 묻자, 얼마 전 회사에서 경영진이 단체 미팅을 소집했는데, 회사 상황이 매우 안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면서 구조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돈줄을 대주고 있었던 투자자들이 발을 뺐다라는 말이었다. 이 친구네 회사는 정말 내가 위에서 언급한 fancy한 스타트업 그 자체였다. 컴퓨터도 다 최신형이고, 사무실도 삐까뻔쩍. 직원수도 하루하루 늘리면서 몸집을 키우고 다른 나라에 지사를 세우고 미국에 나스닥 상장을 하네 마네 하면서 정말 성장률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유망한 회사였다. 그런데 기존에 있던 설립자와 경영진, 그리고 투자자들 사이에서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갈등이 있었는데 투자자들이 돈줄을 끊자 하루아침에 회사는 급격히 불어난 몸집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진 것이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보호가 잘 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하더라도 길거리에 나앉을 확률은 낮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갑자기 회사의 존재 위기가 찾아올 수 있고, 한순간에 해고를 당할 수 있다라는 걱정은 안그래도 걱정거리가 많은 외국인 월급쟁이 입장에서 결코 삶에 포함하고 싶은 부분이 아니다. 그 친구는 어차피 계약 만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해고가 되진 않았지만 이번 구조조정 폭풍으로 인해 직원의 절반 이상이 짤릴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친구의 회사 뿐만 아니라 같은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고 있던 또 다른 기업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했다.
전에는 우리 회사가 투자를 받았더라면 더 빨리 스케일업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하나하나 돌을 쌓아온 설립자들과 초기맴버들에 대한 존경심이 압도적이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다른 회사들 사이에서 조금씩 조금씩 입지를 쌓고 천천히 발전하면서 얼마나 많은 인내심을 가져야 했을지, 성미가 급한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이 사람들이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CEO와 단둘이 면담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앞으로도 우리는 투자 유치를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CEO가 이전에 설립한 회사에서는 투자를 받았었다고 했는데, 그 때 위에서 언급한 상황과 비슷한 일을 겪어서 다음에 세우는 회사에서는 투자없이 성장하겠다고 다짐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차피 이제 평생직장따위는 없는 세상이기 떄문에 고용안정성은 그다지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나에겐 꽤나 중요한 토픽이다. 내가 원해서 내 발로 나가는 것과 등떠밀려 나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에. 특히나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서 일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