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16부작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방영되었다. 코로나 19의 바이러스가 상륙해 휩쓸고 간 빈자리가 버프였는지도 몰라도, 원작 영국 BBC 드라마 <Doctor Foster>을 한국화 하여 리메이크한 드라마라는 배경은 이목을 끌었고 더군다나 (이해할 수 없게도 늘) 대중에게 소비되는 불륜이란 키워드와 함께 여론은 떠들썩했다. 들어보니 세간에 이 드라마를 표현하는 세 단어를 배신, 치정 그리고 파국으로 꼽았단다. 이 세 단어를 주워듣고 나서도 시청하고 싶은 마음은 일지 않았지만, 한국 사회의 고정관념과 성차별을 꼬집었다는 드라마 설명엔 궁금증이 생겼다.
죽을힘을 다해 서로의 목을 조이는 치열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
특정한 드라마의 내용이 화제가 되기 시작하면 그와 관련된 비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재현해 낼 것인가 (그것도 리메이크하는 드라마라면 더욱)를 꼬집어 볼 때, 극 중 지선우 역할과 여다경 역할에 더욱 몰입할 수 없었던 이유 몇 가지를 짚어보았다. 첫째는 원작 <Doctor foster>에서도 주목한, 이제는 지겨울 정도인 여적여 (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이즈가 지나치게 적용되었다는 점과 대중에게 늘 소비되는 뻔한 구도로 여론 몰아가기 현상 때문이다. 물론 각 나라에서 문화적으로 소비되고 다뤄져야 하는 부분은 상이하며 그대로 넘어오지 않은 부분도 존재할 것이고 많은 편집과 수정을 거쳐 각색했을 테다. 하지만 비판적인 부분은 어떤 맥락에서 작품이 만들어지는가를 고민하고 시각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모든 미디어의 창작자들이 가장 치열하게 고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는 현상을 따라가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장면이 부적절했는지 논의할 수 있다.
종종 켜는 유튜브 사이트에 클립으로 뜨는 부부의 세계 영상을 클릭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제목과 썸네일에 홀리듯이. 채널은 짧은 편집으로 주요 영상을 잘라 업로드했지만 이를 몇 개만 대충 둘러봐도 한 에피소드의 대략적인 플롯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요샌 드라마를 유튜브에서 이렇게 보네, 예전에는 TV로만 드라마를 봤었는데... 4분 남짓한 영상 몇 개를 보고 나니, 끝까지 시청하고 싶은 마음은 말끔히 사라졌다. 아니,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드라마 초반에는 그나마 잠잠하지만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도를 지나치는 폭력, 범죄 행위가 반복적이고 지나치게 생생히 묘사되고 있었다. 단순히 구현의 차원을 넘어서, '어떻게' 구현되는가는 분명 되짚어 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지나친 노출, 폭력 또는 설정이 가미된 영상물은 소비하지 않는 것이 개인적인 원칙이다. 소비자가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선택권은 다르고, 그 영상물이 짙은 폭력성을 띄고 있다고 해서 소비할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은 미디어 산업 속 혐오대상, 범죄 대상, 성적 대상화가 되어왔는지 짚어보면 대중과 제작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과연 무얼까 되묻게 된다. 윤리? 법? 창작자의 권리? 우리 주변에서 클릭 한 번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 드라마, TV 속 모든 '여성'을 향한 클리셰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남성들이 그들 사이에서 여성을 트로피 취급을 하거나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점 등 (셀 수도 없는) 문제의식 없는 구현 방식에 오랫동안 노출되어왔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시청자는 극 중 인물에게 드러나는 심리나 행동 묘사를 통해 그 캐릭터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것인지, 카메라 워킹을 어떻게 하고 이 장면에선 이 부분을 극대화시킬 것인지 등, 모든 장면과 대사와 서사는 그물망처럼 촘촘하고 세밀하게 계획되어 있다. 제작자가 어떤 편집과 구성으로 대중에게 내놓아지는지 그 메시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고민한 것들이 결과물에 그대로 담기게 되기 때문에 시각을 다양화하는 것은 중요한데, 이러한 고민이 과연 어디까지가 올바른가를 생각해보면 안타깝게도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애초부터 문제가 차고 넘치는 현실이다.
뻔한 여적여 구도, 여성 성적 대상화 등은 말할 것도 없지만, 경악을 한 부분은 가해자 시점으로 폭행을 마치 게임 다루듯(집에 침입한 괴한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가해자 시점으로 게임처럼 보여준 가상현실 VR 촬영 기법) 표현한 장면이었다. 비명이 새어 나오는 입을 틀어막고 시청했다. 극 장면 속 가해자는 분명 이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폭력을 행하며 즐기고 있었다. 일방적인 시점에서 배우 김희애의 역 지선우는 처참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표정에 드러나는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이 화면 밖의 내게 생생히 전해졌다. 이러한 장면들이 그대로 공중파를 타고 대중에게 보이다니. 이를 지닌 맥락과 의미는 무엇일까. 대체 무슨 이유로 이토록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구도로 콘텐츠는 제작되어야 하며 대중은 소비해야 하는가. 장면이 내게 남긴 생생한 잔해와 깊은 무기력과 또 몇 주 간 싸우다가 말겠지,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는 깨진 유리 위를 나뒹굴고, 쓰러지고, 목이 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심각한 가정폭력 속에 얽히고 당하는 심은우 배우의 역할 민현서 또한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범죄 설정의 클리셰, 그 단순함을 넘었다.
<이수정 이다혜 범죄영화 프로파일>에서 이수정 교수님은 미디어 속 범죄를 다룰 때 사건만으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범죄 안엔 사람이 있고, 피해자, 피해자의 가족들이 있다. 폭력적인 내용을 다루다가 1388 번호를 내보낸다고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애당초에 내용을 다룰 때 조심성 있게, 누군가는 실제로 비슷한 사건으로 목숨을 또는 작품을 따라 범죄를 모방할 수 도 있다 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드라마 속 그 장면은 대놓고 '가해자' 시점의 폭력을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있었다. 영상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피와 머리카락으로 얼룩진 김희애 배우의 얼굴을 움켜쥐고 목을 조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후 며칠 동안 손을 씻을 때마다 그 끔찍한 장면이 떠올라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해야 했다. 나의 일상이 이토록 얼마나 영향받는가를 생각해보면, 어떤 콘텐츠에 내가 노출되는가를 신중히 선택하는 것은 필수가 되어버린다.
단순한 "나만 불편해?"를 넘어, 극 중 역할의 위치를 상기해 볼 필요
포스터나 마케팅에 쓰이는 각종 사진을 보면 김희애 캐릭터 지선우, 박해준 캐릭터 이태오, 여다경 캐릭터 한소희 셋은 비슷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다. 얼핏 보면 그들은 서로를 상대할 수 있는 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불편한 점은, 실제 극 중에서는 (너무나 분명하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선우에게 가해지는 협박, 폭행, 살인 같은 범죄는 물론이고 온갖 가스 라이팅에 배신과 욕설은 기본으로 회당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되는데, 이를 참으며 (이를 테면 고구마를 먹는 듯 목이 메는) 고통스럽게 시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청자는 대개 힘들지만 끝까지 시청하겠다는 (이 답답함을 한 번에 해소시켜줄 사이다를 들이켜기 위해서) 쪽과, 힘들어 더 이상 시청을 그만둔다는 쪽으로 갈라졌다. 드라마 속, 복잡한 정황과 이유 속에서 그녀와 그녀 주변의 여성들은 전부 힘없이 당한다. 힘, 즉 권력 구조가 그 무엇보다 확실한 부분이다. 그 사이 개인적 감정이나 심리가 복잡하고 세세하게 드러나는 점이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이유나 재미가 될 진 몰라도, 나는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내 공감 대상은 이런 고통을 일으키는 가해자가 아닌 당하는 그녀들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떠한 인풋 in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달라진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의 박연준 작가는 남이 보여주는 것만을 보고 자극적으로 편집된 텍스트와 이미지에 노출된 덕에 읽는 능력을 잃어버린다고 했다. 결론적으론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또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맥락에서 쓰인 글인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타자들의 영향 아래 내 삶이 놓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타깝게도 매일 그렇게 살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 내가 무엇을 흡수할 것인지 선택은 할 수 있지만, 그 선택지는 너무나 광활하고 무차별하다. 핸드폰 화면 속을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나의 일상만 해도 가중되는 선택지에 쉽게 피로해진다.
스마트폰, 패드, 컴퓨터라는 작은 기계에 의존하게 된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겁내게 되었고, 무작위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영향 아래 인형처럼 흔들린다. 생각해보면 나의 정체성의 많은 할을 이루는 것은 현재까지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위인들 이야기나 나라를 구한 영웅담이 아니다. 어릴 때 본 TV 속 가스 라이팅 당하고 경쟁을 부추기거나 여성을 다각도로 멸시하는 구도의 장면(문제의식 없이 노출되었었음을 지금은 알지만 당시엔 몰랐기에), 남성 여성은 '원래' 이래야 해,라고 후려치던 가부장적인 사고(보통은 어른들에 의해 듣게 된다) 등이다. 내가 보고 듣고 읽는 것 중 무엇을 흡수할 건지 선택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무언가 달라졌을까. 올바르고 그른 것을 구분해 내가 가릴 수 있었다면, 좀 나아졌을까?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의 정희진 작가는 글쓰기 3대 요소는 정치학(입장), 윤리학(방법), 미학(문장)이라고 했다. 이 중 하나라도 명확하게 굳히기 위해서 오늘도 쓰고 듣고 읽고 나를 채운다. 나 자신은 내가 받아들이는 인풋들로 인해 채워지고, 아웃풋을 도출해 낸다. 나를 아는 것은 평생 애써야 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 과정을 글쓰기를 택하여 신중하게 나를 구성할 인풋을 고르는 것이다. 나는 무엇에 열광하며 어떤 콘텐츠를 소비하는가, 그리고 해야 하는가를 소비자 입장에서 고찰하면 분명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글과 음악 또한 창작하는 분야에 속한다. 나의 말과 목소리가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가 닿아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긍정적이며 희망적이길 바란다. 내가 무엇을 구현해내며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글을 쓰던, 그 콘텐츠를 읽고 듣는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길 바란다. 모두 가능한 한 다양하고 많은 시각을 염두해 창작 과정을 거치려 노력하는 것, 고민하는 것 또한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