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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Oct 22. 2020

나의 진정한 배움은 아이들로부터였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긴 한 해가 될지 정말 몰랐지만) 한용운 선생님께서 집필하신 서울 북촌에 위치한 계동길 위 집에 머물며 선생님의 흔적과 자취를 느끼고, 지난해를 반추하는 글 한편과 새로운 해의 다짐, 소망 등을 채우는 글 한편을 썼었다. 글에 적힌 다짐 중 대표적인 몇 가지는 다름 아닌 '잘 읽기', '잘 쓰기' 그리고 '잘 가르치기'였다.


    몇 년 동안,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의 글쓰기, 파리에 파견된 연구원들 또는 석사생의 논문을 봐주며 다양한 한/영 글쓰기를 수업해왔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대가 열리면서 아쉽게도 대면이 필수인 보컬 레슨을 듣는 학생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줌 zoom을 통해 글쓰기 수업은 계속할 수 있었고, 끈을 놓지 않으면서 학생들과 온/오프라인으로 고마운 인연을 이어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다. 글을 쓰면서 내 감정을, 그리고 감정이 담겼던 상황을 찬찬히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제야 비로소 상황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의 감정선이 직접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 시간을 돌아보는 데 시간과 품을 들이는 작업인 것이다. 이로 인한 장점은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것들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나와 타자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이다. 이는 종종 배움과 성찰로 연결되니 성장을 도모하는 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수업에서 에세이를 써오는 숙제를 낼 때마다 학생들이 늘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하면 '잘' 쓸까, '언제까지' 써야 하나 하는 고민이 아닌, 바로 '뭘' 쓸까 이다. 소재의 부재는 학생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관해 쓴다면 그도 최소한 수십 가지가 될 것이요, 계절에 따라, 식감에 따라,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음식에 대한 감정은 수만 가지로 달라진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바에 따라 주제는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고 반대로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생각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학생들은 의미보다는 주제 자체에만 치중한 나머지 이번 주 에세이는 대체 뭘 써야 하나, 하는 생각에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그 작고 귀여운 머릿속에 뭔가 또르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글쓰기 시작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조금씩 쓴 글의 조각들이 모이자, 이 같은 경험이 자신들을 더욱 단단한 사람으로 빚는데 큰 몫을 함을 깨닫는 듯했다. 어딘가에 발표, 출판되지 않거나, 당선되거나 등단하지 않으면 어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 끝에서 탄생된 글. 그 사실만으로도 나와 내 학생들은 서로의 소박한 글을 좋아했고, 생각의 근육을 키우고 성장하는 도구로서 글쓰기를 사랑했다. 내가 읽은 만큼 쓰고 쓴 만큼 성장한다는 진리, 이는 의미 없이 살아가는 내게 너무나 좋은 장치이니까. 이러한 점을 수업에서 나누는 것은 내게 가장 값지고 귀한 경험이었다.





    물론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이성과 감성을 의식적으로 검열하지 않아도 연마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사적인 일기를 공개적으로 오픈해버리는 무모한 면을 가지고 있다. 페북을 통해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쓴 지식의 통합을 잘 보여주는 글, 감정적인 서사가 잘 드러나되 사안을 잘 담고 있는 정리된 글,  예리하고 섬세한 상태로 용감한, 독자에게 위로가 되면서도 영감이 되는 그런 멋진 글,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글 등을 읽다보면, 나 또한 그렇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글쓰기는 딱 내 경험만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 쓸 수는 없다. 하지만 내 글은 늘 부끄럽고, 부족하고, 터무니없고, 달군 돌처럼 그 순간에만 뜨거웠으며 늘 식어버린 잿더미처럼 초라했다. 뜨거운 가슴을 잃지는 않되 차가운 머리와 깊은 지성으로 활자를 붙들어야 하건만, 자문하면 늘 마음만이 앞선 탓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얕은 배움이 발목을 붙잡고 글의 완성도를 끌어내린다. 더 많이 알고 싶은 욕심, 주어진 것을 뛰어넘는 목마름에 활활 타버릴 것만 같았지만, 이런 마음을 학생들과 솔직하게 나누었다. 학생들이 내게 배워가는 것보다,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그런 염치없는 선생이다.


    글쓰기를 가르침은 물론, 올바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자세를 갖도록 하는 것이 수업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단계별로 아이들의 적응력을 살피고 맞춤 지도 학습을 펼쳐야 하기에 커리큘럼과 수업의 디테일은 늘 조금씩 변화해왔다. 지난 몇 년 간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을 상대로 글쓰기 수업을 이어왔고, 점점 더 구체화되고 세분화되는 학교 과제와 사회에서 민감하게 다뤄지는 이슈의 흐름 등에 편승해 학생들과 함께 발전을 이뤄왔다.

    

    나 또한 글쓰기에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는지라, 에세이를 완성하고 나면 늘 학생들과 공유한다. 서로가 쓴 글을 돌려보고 같이 소리 내 읽는 작업은 상대방과 내가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독자로서 감상평을 장려하게 되면서 읽는 법, 쓰는 법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물론 글을 읽고 나서 감상평이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이미 소리 내 읽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글이 어떻게 써졌는지 귀로 들리는 경험을 하면서 글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며 동시에 느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에세이 쓰는 기본적인 틀이 글에 적용되려면 정교하고 세세한 디테일 작업들이 동반되어야 한다. 여기서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절한 어휘 표현을 통해 나의 생각과 주장을 구분하여 끼워 넣는 과정, 문장을 흐름에 맞게 적절히 배치하는 방법 등을 놓치지 않고 지도해주는 것. 하지만 글쓰기에 있어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글 쓸 주제를 정하는 일이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의 틀 안에서 보낸 아이들의 대다수는 선택지 앞에서 내가 '뭘 원하는지'부터 알지 못하고, 글 쓰기 주제 선택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에세이를 쓰는 시간이 만약 60분이라면, 첫 10-20분을 뭘 쓸지 '정하는' 과정에 할애할 정도다). 이러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해져 있는 답만을 요구하고 성적을 매기는 경쟁구도 방식의 교육은 답답한 상자와도 같이 느껴졌다. 이는 분명 학생을 틀 안에 가두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굳어버린 틀 안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학생들을 다시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며, 교육자로서 어떻게 하면 '권위'를 내려놓고 적절한 '통제'를 이룰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최근엔, 학생들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바로 그동안 가장 오래 가르친 (대략 2년 정도) 학생들이 마침 한국행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 나와의 수업에 대한 에세이를 적고 싶다고 자청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주, 학생들이 완성했다며 보내준 에세이를 같이 읽었다. 아이들의 글엔 그동안 노력했던 나의 진심이 닿아 있음이 드러나 있었다.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게 더 많았던 선생님인데... 사랑을 아끼지 않고 나눠주는 고마운 아이들. 나의 진정한 배움은 아이들로부터였음을, 그들은 알까. (아이들의 동의하에 에세이 일부를 공유)





학생 1 :

레일라 선생님과 했던 첫 수업에서 내가 바랬던 건 오직 즐거움이었다. 나는 적는 것, 특히 에세이를 잘 적는 것을 배우고 싶었다.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나'에 대한 에세이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에세이를 읽어 봤을 때, 나는 내가 좀 더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일라 선생님으로부터 2년 동안 수업을 받으며, 나는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더욱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정말 좋은 글을 적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 브런치에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좋은 글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을 얻었다. 더 얘기하자면, 선생님이 직접 글에 대해 설명해주는 걸 들었을 때, 나는 그 글들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듣는 것으로 많이 배웠다. 수업에선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관점도 배울 수 있었다. 세상엔 어떠한 편견들이 존재하는지 또한 배웠다. 전에 한국에 있는 학원을 다닐 땐 선생님들과 내가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보를 주입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레일라 선생님과의 수업에서는 상호 간의 관계와 대화를 유지했다. 이 계기로 난 정말 많이 성장했다.

내 꿈을 찾기 전에는 아무런 취미가 없었다. 나는 늘 똑같은 날들로부터 피곤했다. 똑같은 하루, 똑같은 방식들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난 새로운 꿈을 찾게 되었다. 이 과정은 레일라 선생님에게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나의 사진들이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해주셨다. 왜냐하면, 그 사진들은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 분위기 그리고 그 사진을 찍는 방법까지 녹아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난 그 똑같고 지루하기도 한 하루에서 잠깐 쉬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이젠, 사진작가의 꿈을 꿈으로써, 사진을 찍음으로써 수많은 것들의 관점을 배울 예정이다.

그 외에도 다른 많은 것들을 배웠다. 하나의 예시를 들자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다. 우린 가끔 레일라 선생님의 집으로 놀러 갔다. 선생님 집은 늘 우리의 좋은 안식처가 돼주었다. 그곳은 조용했고, 나는 날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추가하자면, 수업에서 내가 고친 몇 가지 안 좋은 습관들이 있었다. 선생님과 처음 수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항상 선생님이 나에게 뭔가를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않고 되묻곤 했다. 물론 지금은 의견을 가지지 않고 되묻는 것은 좋지 않은 거란 걸 잘 안다.

난 항상, 내가 레일라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곤 한다. 전에는 내가 성장한다는 걸 몰랐지만 지금은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나는 선생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학생 2 :


    

이 에세이는 나와 글쓰기 과외 선생님인 Layla 선생님과의 이야기다.


    선생님은 글쓰기 수업을 통해 글쓰기, 단어 공부 등 영어 관련된 것을 많이 가르쳐 주셨다. 배운 것이 학교에 나올 때면 항상 '아, 이거 선생님이랑 배웠는데'라며 기뻐했고 도움이 되었다. 성적 또한 매우 올랐다. 숙제를 안 해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처참했던 2학기와는 달리 지금은 시간 내에 해가는 것은 물론이고 성적도 꽤 좋게 유지되고 있다. 지금도 과외를 하며 처음 쓰게 된 에세이와 최근의 에세이를 비교하면 발전이 확고하게 보일 정도로 변화가 확실하다. 그만큼 많은 걸 배우고 함께했다는 뜻이고 또 내가 이토록 실력이 늘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선생님과 수업 시작 전에 항상 나눴던 대화. 새로운 걸 배울 수 있는 기회였고 또 사소하게 있었던 일까지 모두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고맙고도 행복했다. 어쩌면 하루 수업 중 그 시간이 제일 즐거웠을 수도 있다. 수업이 기다려지게 만드는 수많은 이유 중 한 가지이다. 이 외에도 생각 근육이라는 것을 기르도록 도와주셨고,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아이디어 트리 같은 유용한 것들을 많이 가르쳐주셨다. 이걸 모를 때는 어떻게 공부를 한 걸까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공부법이나 노션같은 편리한 온라인 정리 노트 등을 알려주셨다. 정리노트로 완벽한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며, 노션을 통해 함께 공부하고, 배움의 폭이 넓어지며, 기록의 중요성도 깨닫게 되었다. 언제는 한번 선생님의 노트를 본 적이 있다. 정확하게 보지는 못하였지만, 정성스럽게 준비한 것들이 적혀있는 것을 보고는 존경스러웠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중 기록 하는 것이 있는데 잊지 않도록 꾸준히 기록을 하는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더라도 잊을 수 있지만 기록을 해둔다면 나중에 다시 확인해 공부 할 수 있다. 또한 조금이라도 매일 같이 늘 글을 쓰는 것과 나의 생각을 남기는 것 등이 있었다. 늘 글을 씀으로써 조금씩이라도 글쓰기 실력이 늘것이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매우 성장해 있을것이다. 그리고 책이나 글 영화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슈에 나의 생각을 남기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그로인해 내가 생각을 하고 나만의 의견을 만들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났다. 가르침을 늘 화목하고 재밌게 받지만은 않았다. 당연히 내가 잘못한게 있을때도 있기에 선생님께 혼이 나기도 한다. 혼나는 것이 싫었다. 혼나는게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잘못은 한 것은 사실이니 혼나는 것이 마땅했다. 그로 인해 나의 약점을 돌아 볼 수 있었으며 고쳐나갈 수도 있었다.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은 숙제 시간내에 해가기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앞으로 고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는 함께 약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며 개인적으로 느낀 점들을 적어보겠다. 일단, 지금까지 만나온 선생님들은 모두 선생님과 학생 간의 선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 선이 제아무리 미묘하고 애매하며 없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선이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가끔은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정보를 주기만 하는 관계. 그게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선생님들과의 관계였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선생님은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주며 때로는 공감, 때로는 반대의 입장이 되어 조언을 주는 등 이렇게까지 나 하나의 이야기에 적극적인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이런 사람이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 프랑스 파리에 오게 되어 정말 기대해본 적 없는 선생님을 만났다. 그래서 레일라 선생님이 더욱 좋았다. 정말 말 그대로 친구 같았다. 서로 소소하게 생각을 나누며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관계이며 마음속의 응어리도 털어놓을 수 있는 진짜 친구이다. 그런 친구를 원했으나 지금까진 없었고 이 친구라는 관계를 난생처음 과외 선생님과 맺게 되어 새로우면도 행복했다. 또한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닌 상호작용을 하는, 양쪽 모두 배워나갈 것이 있는 이런 방식의 수업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친구 같으면서도 서로에게 항상 배울 것이 있다는 점이 우리의 대화에 있어서 가장 좋은 점인 듯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수업을 하는 것 외에도 선생님의 집으로 초대해 함께 밥을 먹고 놀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자신의 집에 초대해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서로 간의 믿음이 있고 그만큼의 친분이 있다는 뜻이기에 더욱 내게는 특별했다. 항상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스파게티는 기억에 남았다. 우리 집에서 가져온 보드게임인 부루마블, 우봉고를 함께 하거나 브롤을 재밌게 플레이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영양가 있는 대화나 실없이 재밌는 농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 등 많은 말을 함께 해 생각을 나누었다. 편안한 공간에서 배부르고 행복한 상태로 하는 대화란 정말 즐거웠다. 이토록 각별한 사이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또 축복이다. 내 인생에 선생님만큼 진짜 친구 같은 사람은 또 없을 것 같다.

 우선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나는 무지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에 눈을 떴다.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더 생각하게 되었으며 선생님이 생긴 동시에 친구가 생겼다. 앞으로도 남은 시간 동안 함께, 그리고 연이 닿는다면 한국에서도까지 서로에게 안식처이자 배움이 가득한 친구 같은 사이로 지내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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