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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Mar 16. 2024

여성의 날, 그리고 꺄놀레

 

   2023 작년 3월 8일, 115회를 맞은 여성의 날에는 이런 글을 썼었다. 노회찬 재단에서는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전국 곳곳에서 장미꽃 나눔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작년 성평등 메시지는 '성차별 없는 세상, 평등하게 안전한 나라'라고. "성평등을 향해 전진하라", "미투 운동 이끈 여성들", "이미 시작된 균열" 등의 구호를 바탕으로 여성대회가 준비되는 마당을 보는 동시 여러 매체에 연대의 제목을 붙인 기사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차별과 증오가 만연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목소리를 내는 존재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떠오른 건, 대략 3년 전 읽고 단상을 적어둔 장영은 작가의 책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였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장영은 저, 민음사: 브론테 자매의 초상화


          제목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장영은 작가의 이 책엔 글쓰기로 한계를 극복한 여성 25명이 쓰고, 싸우고, 살아남은 이야기가 전반에 걸쳐 담겨 있다. 작가의 할머니가 삶의 의미를 찾았던 글쓰기와 기도로부터 시작한 여성 작가들의 삶과 글에 대한 고찰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의 공저자로 참여하면서 후 쭉 이어져왔다고 한다. 쓰다, 싸우다, 살다 총세부로 나누어져 1800년부터 2000년대 태어나고 활동한 각각 다른 시공간의 스물다섯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이들은 겉으로 보면 공통점을 찾기 어렵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서로 닮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랫동안 좋은 독자였다가 어느 날 멋진 작가가 되었다는 것. 평생을 쓰거나 읽었다는 것. 앞으로 걸어가며 어떤 경우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는 것. 글과 삶이 일치했다는 것.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결코 꺾일 수 없었던 글에 대한 의지를 가졌던 그들임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것을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그 차이를 분명히 알면서도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사람들과는 함께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는 도리스 레싱 Doris Lessing의 이야기는 작가로서 그리고 독자로서 준수하는 자신만의 엄격한 원칙과 정의가 바로 서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녀가 항상 경계했던 미래가 달라질 리 없다고 단정 짓는 '도덕적 피로'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약간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지금의 것을 하자라고 생각하며, 그는 바로 귀와 눈을 열고 읽고, 쓰고, 말하는 것임을 알고, 꾸준히 달려왔지만 세상 모든 고민을 짊어진 사람처럼 늘 주저앉기를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이러한 피로감에 무기력해지고 어지러운 것만은 아녔구나. 그녀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모두 자신과의 싸움에서 늘 패배하고, 인정하고, 실수하고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그녀의 글은, 감사하게도 작가로서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어서 영감이 되어주었다.



     '자신이 쓴 글 앞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무엇인가 미진함을 자주 느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함량 미달의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딱 내 경험만큼만 할 수 있는 일인 글쓰기를 해오며 나의 한계와 바닥을 늘 마주하는지라, 그녀의 이러한 생각이 글로 적히고, 책으로 출판되고, 온 세상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 겪은 그 외로운 과정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감, 우울증, 실천, 도약. 어떤 말로도 그녀의 삶을 명확히 정의할 순 없지 않을까. 매일 열 시간 이상 읽고 쓰는 규칙적인 삶을 실천했다는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글엔 상상할 수 없는 치열함이 서려있다. 그 누구도 지켜보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시대적 풍요로움을 누리는 지금의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일까를 묻게 한다. 나에게 얼마큼 치열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아마 대답하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나는 오직 나의 배움을 위해서만 글을 써왔고, 그의 갈망은 얕은 우물과도 같았으니까.



     한 때는 고전도 여자가 읽으면 나쁜 책으로 둔갑되고, '작가'는 남성만이 가질 수 있는 타이틀이기도 했다. 그런 금기를 깨려 노력한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Sidonnie Garbielle Colette는 자기만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항상 명쾌한 답을 찾았다고 한다. 얼마나 멋진가, 자기만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인지 아는 여성이라니. 나는 아직도 내가 뭘 쓰고 싶은지 1도 모르는데(몇 플랫폼을 전전하고 있기도 하고) 생애를 소설로 발표한 그녀는 이미 그 시대부터 여성의 서사가 얼마나 중요하고 알려져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았던 여성의 삶이 그녀의 글로 쓰이는 순간, 그녀는 또다시 탄생한 것 과도 같았을 것이다.



     삶의 전반적으로 걸쳐져 있는 모든 정신적 연결고리는 '나'와 '타자'로 귀결되며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관계인 '가족'에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 그렇기에 궁극적으로 사랑이라는 공통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러한 배움을 주는 글을 늘 찾아다니고, 모아두며 조용히 흠모하게 된다. 제이디 스미스가 지향하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문학을 나도 꿈꾸며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지금 쓰고 읽는 것에 존재한다"



     이 책 속엔 "글 쓰는 여자는 - 한다"라는 형태로 반복되는 문구가 수 차례 반복해서 나온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한 구절을 떠올려보자면 이것이다. "글 쓰는 여자는 세상을 포용한다." 늘 개혁과 보수가 공존하려 다투는 세상에서 글로, 문학으로, 음악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포용하는 그 용기와 담대함을 이 책 속의 25명의 여성들에게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나는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비가 내린 어느 아침, 12구의 자주 가는 서점이 위치한 거리에서 젖은 손과 발들이 비록 투덜대더라도 꼭 맞잡고 걸어가는 모양새를 보며 글을 썼던 때를 떠올린다. 그런 귀여운 모습을 카페에 앉아 구경하며 달콤 쌉쌀한 꺄놀레를 주문했던 기억이다. 아마 그날 썼던 글은, ‘올해 안으로 인생 꺄놀레를 구워보기가 목표’...라는 당찬 내용이었을 것이다. 꺄놀레의 정식 명칭은 "카늘레 드 보흐도(Canelés de Bordeaux)"이다. 이 중 꺄놀레(canelé)는 프랑스어로 "세로홈을 판, 주름을 잡은, 골이 진"이란 뜻이다. 이때 까놀레 만들기에 한창 빠져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파리에 와서야 처음 꺄놀레를 맛본 촌스런 사람이었던 나는 깜짝 놀랄 정도로 달콤하고, 쫀득하고, 바삭한 디저트에 단숨에 반했다. 종종 음악원에서 수업을 끝내고 나면 나에게 주는 상으로 늘 꺄놀레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렇게 맛있는 구움 과자를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하지만 그 해는 정말 마음대로,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해였다. 많은 활동을 혼자 기획하고 혼자 생산했지만 그럼에도 나 스스로에게 소속감을 부여할 수 없었기에 망연자실 혼자 울다 지쳐 잠에 들곤 했다. 음악원, 그리고 유학생활을 함께 견디는 동료들. 이 두 공동체가 나의 세상의 전부였고, 연습과 글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누군가 나에게 인생의 과정을 내가 잘 느끼고, 음미하고, 조절하고 있는가? 를 묻는다면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이 달콤한 꺄놀레가 나를 달래주는 유일하고 오롯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사람도 관계도 나를 채워주지 못했다.



   타인의 고통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은 수전 손택처럼, 오직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용기만을 간구한 에밀리 브론테처럼, 내가 바라는 나 자신의 진정한 생활을 쟁취하는 가네코 후미코처럼, 삶을 포기하지 않은 박경리처럼, 닮고, 살고, 쓰고 싶었지만... 현실의 나는 넘어진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에 바빴고, 오래된 오븐을 붙잡고 꺄놀레 틀과 씨름을 하다가 울부짖는 일은 반복하기에 바빴다. 몇 번의 레시피 수정에도 제대로 구워지지도 않고, 또는 너무 구워지기도 해 반죽을 버리기도 하는 꺄놀레는 점점 나를 위로하는 디저트가 아닌 애증의 것이 되어갔다. 연습을 할 시간도 부족한데, 오늘 충분히 불어 공부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꺄놀레 굽기에 매달릴 일인가? 하지만 이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것 같은데. 이미 진즉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닐까?



   나는 과감히 선택했다. 이미 오븐은 몇십 차례의 시도로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로 태워먹었고, 꺄놀레 반죽에만 생활비의 반을 썼다. 이미 레시피를 수정하고 굽는 과정에서 나는 충분한 시도의 만족감을 얻었고, 베이킹에 관한 기초 언어와 지식을 배웠다. 나의 기대치에 미치는 꺄놀레를 굽기는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된다. 내게 필요했던 건 나를 위로하는 것들에 매달리는 나의 열정을 통해 내 인생 속 어떤 프로젝트던 간에 언제든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고, 재개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쥐고 통제할 수 있다는 힘. 그 힘을 느끼고 싶어 사실 꺄놀레를 굽기 시작한 게 아닐까-라고 2024년의 나는 생각한다. 정 꺄놀레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면, 파리에서 가장 맛있는 꺄놀레 가게를 찾아가서 사 먹으면 될 일이니까(그해 1등을 한 바게트 불랑제리 Boulangerie를 찾아다니고, 이에 대한 글을 썼을 정도로 진심인 나는 이렇게 깨달았다고)



   올해 3월 8일 여성의 날을 축하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많은 목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이때의 좌절과 극복을 떠올렸고 또 글로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눈물 닦으면 에피소드라는 맷님의 명제는 2023년에 이어서 지금도 올해의 한 구절이니까. 가능하다면 그때의 나에게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쥐어주며, 다 에피소드가 될 거야. 2024년의 나에게도 여성의 날은 또 오고, 축하할 수 있는 감사한 환경이 주어진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당장 내게 삶의 주도권이 없는 것 같이 비참하게 느껴져도, 괜찮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이다. 참, 회생 불가능한 오븐을 살리려 닦고 또 닦는 며칠을 낭비하지 말라고도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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