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을 잃어버린 사회

이언 매큐언 <속죄>

by 두둥실


소녀 브리오니의 작은 오해는 한 남자의 인생을 무너뜨리고, 한 여인의 사랑을 끝내 파멸로 몰아넣는다. 그녀는 단편적인 장면을 보고 스스로 확신했고, 그 확신이 곧 진실로 굳어졌다. 하지만 그 진실은 허구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세상이 단편적인 흑백으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사실, 모든 일에는 해석이 열려 있고 진실은 언제나 다층적인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일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사건이란 고립된 점이 아니라 연결된 선과 면, 즉 맥락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맥락을 잃으면 진실은 뒤틀리고, 오해는 증폭된다. 이 점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자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Atonement〉(속죄)다.

(영화도 볼만하지만 책으로도 꼭 읽어보길 권한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점점 더 어린 브리오니와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편만을 보고 성급히 판단한다. 맥락을 잃은 사회 속에서 삶은 점점 오해와 단정으로 굳어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제주도 여행 만족도는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다. 특히 ‘고물가’와 ‘바가지요금’ 논란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며, ‘비계 삼겹살’ 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제주도를 다녀온 사람들보다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기사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몇 장의 사진과 몇 줄의 글만을 근거로 제주도를 ‘바가지의 섬’이라고 단정했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특정 사건의 맥락을 잃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반면, 제주도를 방문한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점차 낮아진다. 그럼에도 인터넷 게시판에는 최근 몇 년간 제주도에 대한 부정적 글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제주도의 바가지 요금은 하루이틀 된 일이 아니며, 물가가 한국 평균 상승률보다 몇 배씩 오른 것도 아니다. 섬이라는 특수성, 성수기와 비수기의 극명한 차이,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특수 호황,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점과 현지인을 상대하는 상점의 차이 등 다양한 맥락이 존재한다. 제주도의 최근 여론 변화는 정보가 생산되고 퍼지며, 특정 이미지로 굳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현상은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단편적인 정보와 감정적 반응에 휩쓸리고 있다. 사람들은 특정 집단, 지역, 혹은 직업군에 대해 직접 경험하기보다 맥락을 잃은 단편적 이야기와 이미지에 의존하여 이미지를 구성한다. 그 결과는 편견과 왜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마치 소설의 한 페이지나 영화의 한 장면만 보고 전체 이야기를 판단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과 뉴스 속 사건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맥락을 이해하기보다는, 짧은 제목과 몇 줄의 기사로 옳고 그름을 단정해버린다. 특정 인물이 한마디를 하면, 맥락은 잘려나간 채 그 문장 하나만이 퍼져나가고, 순식간에 ‘악인’이나 ‘영웅’으로 낙인찍힌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누군가가 실수나 잘못을 했다는 소문이 돌면,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관계와 맥락을 따지지 않은 채 ‘비난’이라는 집단적 의식을 치른다. 이것은 때로 정의의 구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편적 텍스트에 매달린 오해의 연쇄일 뿐이다.

<속죄> 속 브리오니가 로비를 오해하는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브라이오니는 이제 열세 살이 되었고, 이 세상에서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키스였다. 하지만 브라이오니의 눈에는 폭력적인 행위로 보였다."

"그녀는 로비가 악마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롤라를 강간한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책의 초반부에서 브라이오니가 상황을 오해하고 로비가 졸지에 성폭행범으로 몰리는 과정은 매우 상세하고 길게 묘사되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현상의 전부가 아니며, 그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어린 브라이오니는 알지 못했다.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성장하며 평생에 걸쳐 죄의식을 느끼지만 현실에서도 어린 브리오니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기괴한 현상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맥락을 잃는 습관은 일상 속에서도 드러난다. 예컨대 직장에서 누군가가 회의에서 무심코 한 발언이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어 곧장 갈등으로 비화되곤 한다. 상대의 배경, 당시 상황, 그 말을 하게 된 이유를 묻는 대신, 단편적인 어휘만을 붙잡고 불편한 감정을 쌓아간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한 순간의 행동이 전체 인격으로 확대 해석된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말 속에는 맥락을 이해하려는 수고를 포기한 채, 단정 속에서 안도하려는 심리가 숨어 있다.


왜 우리는 맥락을 잃어버렸는가?

첫째, 한국의 교육 시스템 때문이다. 오랫동안 입시 중심 교육은 학생들에게 정답을 요구해왔다. 수능, 내신, 평가는 단 하나의 답을 맞히는 데 초점을 맞췄다. 글쓰기나 토론, 비판적 사고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학생들은 문제의 맥락을 탐구하기보다 빠르게 답을 도출하는 법만 배웠다. 그 습관은 성인이 된 뒤에도 이어진다.

둘째, 숏폼 미디어의 일상화다. 짧은 동영상, 짧은 기사, 짧은 글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맥락을 탐구할 시간을 갖지 않는다. 30초 안에 웃음을 주고, 한 장의 이미지로 분노를 유발하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긴 호흡으로 배경과 맥락을 따져보는 일은 오히려 낯설어진다.

셋째, 과속하는 사회 자체의 문제다. 한국 사회는 늘 빨라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경제 성장, 기술 변화, 유행과 트렌드 모두가 급격하게 변한다.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우리는 깊이를 포기하고, 표면적 판단만으로 대응한다.


맥락을 잃은 사회는 오해로 가득하다. 오해는 곧 불신으로 이어지고, 불신은 사회적 연대를 허문다.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재빨리 재단하려는 태도는 관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결국 서로를 고립시킨다.

브리오니가 끝내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했듯, 맥락을 읽지 못한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단정들이 사회적·정치적·개인적 차원에서 또 다른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어쩌면 답은 단순할지도 모른다. 맥락을 풍부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서로 나누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사유를, 더 많은 토론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말 한 줄을 비난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인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무언가를 평가할 때 더 사려깊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 인간관계 역시 상대방의 전체 맥락을 보려는 태도 속에서 비로소 성숙해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모호함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단순한 정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흑백 사이의 수많은 회색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맥락 없는 판단의 유혹을 이겨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단편으로만 소비한다. 그러나 삶은 결코 단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인간은 맥락적 존재이고, 행복 또한 관계와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피어난다.

<속죄>의 비극은 작은 오해가 평생의 죄의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같은 잘못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제라도 멈추어 맥락을 회복할 것인가.

많은 문제가 있는 세상에서, 서로의 맥락을 존중하고 풍부하게 이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각자의 행복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일 것이다. 우리는 다시 맥락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잘 짜인 소설이 아니라, 매 순간 흩어지고 이어지는 미완의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줄거리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맥락 속에서 오해를 줄이고 이해를 키워가는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면, 잘못 놓인 문장이 아름다운 시가 되듯, 어긋난 삶도 새로운 조화 속에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맥락은 결국 우리를 흩어지지 않게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문맥, 삶을 이어주는 호흡 같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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