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을 넘긴 아저씨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도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내 곁에는 기가 막히게 이야기가 잘 통하고,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여자친구가 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때로는 각자의 시간을 위해 떨어져 지내기도 한다. 가능하다면 이 관계를 오래도록 이어가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방식에 번번이 제약을 건다. 여자친구가 급성 맹장염으로 병원에 실려 갔을 때, 나는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없었다. 간호사와 의사의 질문 앞에서 순간적으로 내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 된 경험은 당혹스러웠다. 또 같이 지낸다는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어김없이 “왜 결혼 안 하냐”고 따져 묻는다. 그 물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제도에 편입되지 않은 관계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회적 시선처럼 들린다.
나는 여자친구를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 그녀가 나 말고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축하해주고 싶다. 물론 나 자신은 크게 아플 것이다. 질투와 두려움에 휘둘려 찌질하게 행동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으려는 이상을 향해 노력하는 일이라 믿는다. 내가 끝내 그 이상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곧 위선은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불완전하기에 이상을 향해 애쓰는 존재다.
이 개인적인 경험은 나로 하여금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 충분히 충만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사회와 제도는 이 관계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다. 법적 보호자의 권리도, 제도적 안전망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혼은 왜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일까? 사랑과 연대가 제도 안에서만 유효하다면, 그것은 사랑의 본질을 배반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오랫동안 ‘당연한 과정’으로 여겨졌다. 청년이 성장하여 취업을 하고, 어느 정도의 기반을 마련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 이는 의무라기보다는 일종의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졌다. 부모 세대는 여전히 자녀에게 결혼을 권유하거나 압박한다. “혼자 살아서 뭐 하니, 좋은 사람 만나야지.” “나이 먹기 전에 자리 잡아야지.”
그러나 이러한 ‘당연한 결혼’의 서사는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가. 역사적으로 결혼은 사랑의 제도가 아니라 가문의 연속과 재산의 결합을 위한 장치였다. 근대 이후 개인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비로소 ‘사랑의 완성’이라는 포장지가 덧붙었을 뿐이다. 결국 결혼은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 단위의 제도였다. 니체가 말했듯, “결혼은 오래도록 이어지는 대화를 상상할 수 있는 자들이 하는 일”이어야 하지만, 현실의 결혼은 그런 상상과는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한국의 청년들은 결혼을 둘러싼 이 제도의 무게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낀다. 주거비, 직장 불안정, 양극화된 경제 구조 속에서 결혼은 더 이상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6년 약 43만 건이던 혼인 건수는 2022년 약 19만 건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2024년 들어 잠시 반등했지만, 이 흐름이 추세적 회복일지는 불투명하다.
이런 현실에서 청년들의 선택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첫째, 결혼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경우. 이들은 결혼이 주는 경제적 부담, 아이 양육의 책임, 사회적 구속을 차라리 피하고자 한다. 둘째, 결혼을 하려면 반드시 일정 수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는 경우. 안정된 수입, 내 집 마련, 양가 부모의 지원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결혼을 더 이상 낭만적 사건이 아니라 ‘투자와 비슷한 전략적 선택’으로 간주한다.
이 두 극단 사이에는, 거의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 결혼은 이제 ”모 아니면 도”의 세계가 된 것이다.
내 경험이 말해주듯, 결혼이라는 제도와 별개로도 충실한 동반자 관계는 충분히 가능하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의 영속성은 별개의 문제다.) 사랑과 신뢰가 있다면 꼭 법적 서류가 없어도 삶은 단단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호자가 될 수 없는 순간,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력해지는 상황 속에서 제도적 벽은 높게만 느껴진다.
사실 인간의 욕망은 단순하지 않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지만, 동시에 그는 사랑이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유를 확인하는 과정이라 보았다. 그렇다면 결혼 역시 반드시 제도의 틀 안에서만 완성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제도 밖에서조차 우리는 서로를 지옥이 아닌 동반자로 만들 수 있다.누군가는 긴밀한 동반자를 원하지만, 제도의 무게를 원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이를 원하지만, 부부로 묶이는 삶은 피하고 싶다. 또 어떤 이는 오랜 시간 함께 살다가도 자연스럽게 헤어질 자유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유럽의 일부 국가는 이미 이러한 요구에 제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프랑스의 PACS 제도는 결혼과 유사한 권리를 보장하지만, 해체가 비교적 자유롭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의 경우, 동거 관계만으로도 법적 보호를 받는다. 이들은 “결혼하지 않아도 동반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도로 담아낸다.
한국 사회는 왜 이런 가능성을 탐색하지 않는가. 우리는 여전히 결혼과 출산, 부양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생각한다. 그러나 동반자 관계와 자녀 양육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결혼만이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인가?”라는 질문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문제는 사랑이 결혼이라는 제도와 잘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랑은 유동적이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순간적이다. 반면 결혼은 안정과 영속을 요구한다. 심리학 연구가 보여주듯 열정적 사랑은 보통 3년 내외 지속된다. 이후에는 우정이나 책임감으로 관계가 유지된다. 그렇다면 제도와 감정은 필연적으로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결혼을 ‘사랑의 완성’으로 포장한다. 청년들은 그 포장지를 불신하면서도, 동시에 그 위선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결혼을 생각하면, 조건과 전략을 먼저 떠올리면서도, 사랑이란 단어를 끝내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거짓말의 핵심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결혼의 다변화 가능성이다. 누군가는 결혼은 원치 않지만 동반자는 원할 수 있다.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싶지만 혼인은 바라지 않을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아이 없이도, 사랑하는 사람과 느슨하게 함께 살아가고 싶다. 이러한 방식은 더 이상 파격적이거나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동반자 관계가 실험되고 있고, 사회적 합의가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결혼 아니면 혼자”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결혼 제도가 유일한 답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젊은 세대가 느끼는 좌절과 불안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 결혼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사실상 허상이다. 그것은 부모 세대의 경험과 전통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관성일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젊은이들마저 이 관성에 동화된다. “언젠가는 결혼해야지.” “결혼은 해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은 무심하게 던지지만, 그 안에는 제도의 힘이 은밀히 작동한다.
그러나 삶은 단일한 궤도로 흘러가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 결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수많은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다양한 방식의 연대를 인정하고, 제도가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제도적으로는 어정쩡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겐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다만 이 사회가 내 관계를 제도적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때로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다시 묻고 넘어야 할 이유다.
결혼은 오랫동안 사랑과 행복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현실의 결혼은 계산과 조건, 부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에 결혼은 거짓말일 수 있다. 문제는 그 거짓말을 무조건 폭로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사이에서 우리가 놓친 가능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삶, 결혼을 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꾸려가는 삶, 결혼을 넘어서는 새로운 연대의 방식. 이 모든 것이 존중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결혼은 더 이상 ‘모 아니면 도’의 선택지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관계를 조직하는 여러 길 중 하나일 뿐이다.
결혼이라는 거짓말을 넘어서, 우리는 다른 진실을 써 내려가야 한다. 언젠가 여자친구가 혹시라도 또 아프게 된다면 나는 당당하게 보호자이고 싶다. 그녀의 자유와 의지를 존중하되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땐 남의 눈치나 제도의 제한 없이 그렇게 하고 싶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결혼의 껍질을 벗겨낸 뒤에도 남아야 할 최소한의 본질일 것이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책임을 나누고, 함께 있는 시간이 서로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 제도가 아니라 관계 자체가 우리를 지탱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결혼을 넘어선 더 넓은 의미의 동반자를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결국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자유는 사랑 속에서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다.” 제도가 아닌 사랑과 연대가 우리를 묶을 때, 비로소 결혼이라는 거짓말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