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그림자와 진보의 환상에 대하여
문명은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져 왔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그걸 잊은 채 살아간다. 교과서와 박물관의 진열장은 여전히 “인류의 발전”을 찬미하지만, 그 발전이 누구의 피와 노동, 어떤 땅의 고통 위에서 이루어졌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지금의 세계 구도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제국주의로 상징되는 <착취>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인간의 탐구 정신과 철학, 과학의 진보 역시 그 역사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나 힘의 불균형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문명의 발전’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사건은 사실 약탈의 세련된 이름이었다.
대항해시대라 불린 시절, 유럽인들은 바다를 건넜다.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모험과 발견의 서사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는 훨씬 더 피비린내났다.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해양 상권은 이미 활발하고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중국, 인도, 아라비아, 동남아시아의 상인들이 향신료와 직물을 교환하며 비교적 균형 잡히고 상호 존중적인 무역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등장하면서 그 질서는 무너졌다. 알부케르크의 함대가 말라카를 점령하고, 상인들의 도시를 군사 요새로 만들었다. 정당한 상업은 폭력으로 대체되었고, 총과 함포가 새로운 ‘교역의 언어’가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제도는 잿더미가 되었고, 인도에서는 면직물 산업이 강제로 해체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수천만 명의 인간이 노예로 납치되어 대서양을 건넜다. 쿠바와 카리브해의 섬들은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덮였고, 브라질과 미국 남부의 목화밭에서는 노예들이 해 질 녘까지 손가락이 찢어져라 일했다. 아프리카 콩고에서는 고무 채취를 위해 수많은 팔과 다리가 잘려나갔고, 남미의 포토시 은광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무덤이었다.(이런 예는 정말 끝도 없이 들 수 있을 정도여서 수십권짜리 사전집을 만들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 모든 학살과 약탈 위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수탈된 자원과 값싼 노동, 식민지의 시장이 없었다면 영국의 증기기관은 그토록 빠르게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문명의 진보”라 불리는 것은 실은 체계화된 약탈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그 착취의 구조는 형태를 바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노예무역이 사라진 자리에 값싼 아시아의 공장이 들어섰고, 총과 대포 대신 환율과 무역협정이 지배한다. 잘 사는 나라들은 자국의 쓰레기와 폐기물을 헐값에 수출한다. 쓰레기를 ‘파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이 그 쓰레기를 처리하며 강과 땅이 오염되고, 그 대가로 얻는 건 미미한 외화뿐이다. 값싼 옷을 만드는 방글라데시의 봉제공장, 전 세계의 전자폐기물이 모이는 가나의 해안, 아프리카의 코발트 광산. 모두 같은 구조다. 그들은 우리가 버린 것을 처리하며, 우리가 사용할 물건을 만든다.
그런데도 선진국들은 스스로를 ‘윤리적’이라 부른다. 자국에서는 자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공장을 철수시키고, 대신 개발도상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사들인다. 표면적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오염은 단지 장소를 바꿨을 뿐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도 또 다른 지배가 이어진다. 그들은 환경 보호를 이유로 여러 제약 조건을 내걸고, 핵심 기술은 ‘지적 재산권’이라는 이름으로 움켜쥔 채 결코 내어주지 않는다. 자본과 기술, 규범의 방향은 여전히 그들의 손에서 출발한다. 결국 착취의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꾼 <전가>의 시대로 옮겨갔을 뿐이다.
이쯤에서 한국을 살펴보자. 한국은 세계 경제대국 중 유일하게 제국주의의 기반이 없었던 나라다. 그 점은 분명 자랑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씁쓸하다. 바깥을 착취할 기반이 없었기에, 결국 안쪽을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 서구가 세계를, 일본이 아시아를 착취했다면, 한국은 자기 자신을 자원으로 삼았다. 빠른 산업화와 근대화의 이름 아래 노동자들은 주말 없이 일했고, 여성들은 희생을 미덕으로 배웠으며, 청년들은 경쟁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제국주의가 외부를 착취했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내부 식민화의 구조였다. 우리는 타인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근대화의 탑을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착취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피해자였다면, 전가의 시대에 들어선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완전히 무고하지 않다. 인도네시아의 쓰레기 산에는 한국어가 적힌 포장지와 폐기물들이 끝없이 쌓여 있다. 저개발국의 값싼 공장에서 만들어진 옷과 전자제품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소비한다. 그렇게 우리의 손끝에서도 누군가의 노동과 환경이 서서히 소진되고 있다. 결국 한국 역시, 형태만 다를 뿐 이 착취와 전가의 거대한 흐름 안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문명은 앞으로 어디로 향할까. 문명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언제나 ‘진보’라는 신화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진보는 결국 무언가를 소비하고,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방식으로만 작동해왔다. 이제 더 이상 그 비용을 떠넘길 ‘다른 곳’은 없다. 자원도, 사람도, 바다도 한계에 다다랐다. 남은 것은 오직 이 지구, 그리고 우리 자신뿐이다.
이 문명은 이런 반복을 계속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면, 착취의 끝에는 공허만 남을 것이다. 철학자 슈마허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전쟁이며, 인간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승리는 곧 자살이다.” (Small is Beautiful, 1973)
다르게 존재할 수는 없는가
믿기 힘들게도, 오늘날의 문명과 자본주의는 여전히 착취와 그 변형된 전가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다. 새로운 시스템이나 대안을 찾기보다, 이미 오래된 방식을 고수한 채 속도를 높이는 쪽을 택해왔다. 그것은 집요한 고집일까, 아니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멈출 수 없는 기차이기 때문일까.
제국주의 혹은 그와 유사한 착취의 구조에서 ‘전가’로 옮겨가며, 이른바 ‘선진국’들은 그 체제를 유지해왔다. 폭력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그대로였다. 가진 자는 더 약한 곳으로 비용을 돌리고, 불균형을 세계의 다른 모서리로 미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폭탄’을 돌릴 곳이 없다. ‘빨대’를 꽂을 새로운 시장도, 자원을 대신 내줄 식민지도 거의 남지 않았다.
애초에 이 끝없이 소비하고 소진하는 문명 자체의 근본 매커니즘—즉, 성장이라는 이름의 착취 구조—가 그런 시스템에 근거했다면, 그 끝이 멀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 유럽과 미국은 그 한계의 징후를 가장 먼저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연일 시위와 파업이 이어지고, 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 각지에서도 분위기는 점점 흉흉해진다. 고물가와 에너지 위기, 불평등의 심화는 더 이상 일시적인 불만이 아니라 체제 자체에 대한 피로로 번지고 있다.
대서양 건너 미국은 또 다른 방식으로 흔들린다. 자신들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 아래 이웃 국가들에 말도 안 되는 관세를 일방적으로 부과하고, 동맹국에게조차 굴복을 강요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세계 곳곳에서 착취해온 자원과 노동 덕분에 지금의 ‘강국’이 되었음에도, 이제는 그 부담을 다시 외부로 넘기려 애쓰고 있다. 결국 전가의 구조는 외부에서 내부로, 그리고 다시 외부로 끝없이 순환하는 셈이다.
그런 역사의 흐름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이미 어떤 심상처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치 좋고 날씨 좋은 곳들은 서양인의 취향에 맞는 관광지 혹은 휴양지가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고 세련된 풍경이다. 어디에도 폭력이나 수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의 해변과 리조트, 호텔의 창 너머로 보이는 잔잔한 바다에는 묘한 기시감이 스민다.
과거의 폭력적인 역사가 그 밑바닥에서 아직 식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듯하고, 관광지의 편의성을 가능케한 인간의 기술과 산업은 동시에 그 자연을 서서히 소모시키고 있다. 그 풍경은 일견 평화롭지만, 어딘가 불길하다. 마치 번영의 표면 아래 서서히 균열이 자라는 세계, 그 위에 세워진 문명의 거울처럼 느껴진달까.
그러면서도 많은 서구권 사람들이 이제 동양의 신비 사상들, 요가와 명상, 불교의 공(空) 사상에 매료되고 있다. 존 레논이 리시케쉬에서 구루에게서 배움을 얻고 Imagine을 노래하던 것도 그런 시대적 흐름의 한 장면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히피 문화는 마리화나와 함께 ‘혁명’을 외쳤다. 한때 그들이 미신이라 부르던 사상들이 이제는 “영성”과 “힐링”의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다. 과학과 문명을 앞세웠던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가치들, 그들의 손으로 부수었던 사상과 전통을 이제 다시 더듬고 있다. 그 흔적을 되짚는 그들의 모습이 우습다고 말하면 과한 표현일까. 그럼에도 그 장면들은 묘하게 씁쓸하다.
나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서양 선진국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대체로 성실하고 선량했다. 하지만 가끔 나도 모르게, 그들의 ‘나이스함’ 너머로 그 조상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폭력의 역사를 떠올리곤 한다. 물론 그것으로 그들을 단죄하거나 판단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이미지들과 그들의 선량함이 묘한 대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는 그저 역사 책 속에서 일부분만 취사선택적으로 배울 뿐, 그 의미를 잊은 지 오래다. 그만큼 이제 돌이킬 수 없이, 알게 모르게 고착화되어 버린 것이다.
가끔 상상해본다. 만약 서양이 말하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자신을 땅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여겼다. 인도의 베단타 철학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 아닌 ‘브라만(궁극적 실재)’의 한 조각으로 보았다. 중국의 도가 사상, 인도와 티베트의 명상, 중앙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신비 전통들 — 모두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본다.
오세아니아의 원주민들은 ‘드리밍(Dreaming)’, 혹은 그들의 언어로 ‘쭈크루파(Tjukurpa)’ 속에서 살았다. 그들에게 ‘현실’은 깨어 있는 세계와 꿈의 세계가 맞물려 순환하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인간, 동물, 바람, 별, 바위는 모두 노래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노래는 단지 신화를 전하는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유지하는 행위였다. 그들은 노래를 따라 걸으며 땅의 길을 기억했고, 불을 이용해 숲을 태우되 생명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생태계를 되살렸다. 이러한 ‘문화적 불’의 사용은 파괴가 아닌 공존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오세아니아를 점령한 서양인들은 그들이 천년 넘게 이어온 그 기술과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미개하거나 비합리적으로 보였을 뿐이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과학자들과 생태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그 지혜의 깊이를 깨달았다. 그제서야 서양은 그들이 한때 ‘야만’이라 불렀던 것이 사실은 지속 가능한 삶의 과학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이었고, 삶은 소유가 아니라 참여였다. 이러한 사상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인간은 세계의 일부이며,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해야 할 존재였다. 그렇기에 서양이 말한 ‘야만’은 어쩌면 더 근본적인 지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길은 바로 그 야만의 길, 즉 세계와의 합일의 길이었다.
모든 문명 중에서 오로지 인간을 중심에 두고 그것만을 끝까지 밀어붙인 것은 서양의 문명뿐이었다. 문명의 기준을 다수결로 정할 수는 없지만, 일대 다수의 대결에서 왜 다수는 패하고 사라졌을까. 물론 그 흔적들은 남아 있지만, 이제 제국의 박물관 속에 박제된 유물처럼 존재할 뿐이다. 어쩌면 서구 문명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은 그들이 가장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가장 강하고 파괴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음’과 ‘강함’은 분명 다르다. 우리가 지금 문명이라 부르는 이 체계는, 더 나은 것이 아니라 더 무자비했던 것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문명은 더 이상 누구를, 무엇을 착취하고 전가할 것인가? 그 마지막 대상은 어쩌면 인간 자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자연을, 타인을, 노동을 소진시켰다. 다음은 마음과 감정, 상상력일 것이다. 나는 문명이 무너져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문명이 다르게 존재할 수는 없는가를 묻고 싶다.
인류가 오랜 세월 야만이라 부르며 무시했던 세계의 지혜 — 인도의 명상, 아메리카 원주민의 순환적 시간, 오세아니아의 드리밍, 동양의 도가와 불교의 사상들 — 그 모든 것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미래의 대안적 모델처럼 느껴진다. 문명은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진보의 이름으로 파괴된 숲과 강, 불안과 피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믿음을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인류의 다음 진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멈추어 듣고, 멈추어 느끼고, 멈추어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일.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오래전 원주민들이 이미 알고 있던 그 진실 — 인간이 아닌 세계가 중심이라는 사실을 — 조용히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