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후원으로 얻고자 한 건 무엇이었을까.
"쪽지 한 장 없이 시설 앞에 버려져 있던 아이."
첫 국내 결연 후원자 소개 프로필로 왔던 강렬한 첫 줄이었다. 프로필 앞장에는 해맑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소년의 사진이 있었다. 어색한 미소 뒤로 보이는 팜플렛과 동봉되어 있는 '나를 소개해 주세요'라는 편지봉투와 편지지. 고작 오만 원을 후원하는 내가, 그 아이의 아픔과 힘겨움을 눈꼽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그런 내가 보내는 편지 한 장이 그 친구에게는 정말 힘이 될 수 있는 걸까? 도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이 후원을 시작한 걸까?
요즘들어 부쩍 모바일 게임에 큰 돈을 쉽게 쓰는 나를 발견하고는, '더 가치 있는 일에 쓰자'라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정기 후원처를 알아봤다. 후원 단체의 횡령이라는 큰 쓰나미가 여러번 지난 터라, 더욱 신중하고자 이곳저곳을 비교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투명한' 단체를 알아보려 힘썼다. 사업 비용을 투명하게 오픈하는 곳. 그러다 문뜩 눈에 띈 후원 프로그램 '결연'. 한 아동과 결연을 맺고 해당 아동에게 메세지를 보낼 수도, 선물을 보낼 수도, 결국에는 만남을 신청할 수도 있다는 국내 결연 프로그램.
가슴 한쪽으로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내가 후원하는 아동이 자라는 모습을 안내해 주고, 그 아동에게 힘이 되는 메세지나 선물을 보낼 수 있다니! 금전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응원도 함께할 수 있다는 그 달콤함에 주저없이 바로 결연 프로그램 신청 페이지를 눌렀다.
"나이나 성별을 지정해주시면 모두 수리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비슷하게 결연 아동을 연결합니다."
30줄이 넘는 안내문 중에서 내 눈을 사로 잡은 단 한 줄의 글귀. 만남, 정신적 지원 등을 고려하여 고학년인 아동과의 결연을 희망했고, 그 다음날이 되자 결연 아동의 이름과 나이가 사이트에 올라왔다. 결연 아동 소개 밑에는 '아동에게 문자하기', '만남 신청하기' 등의 메뉴도 덩달아 활성화되었다.
시설 앞에 버려져 있던 아이. 현재까지도 시설에서, 진로를 고민 중이라는 고1 남자 아이.
편지지를 10분간 쳐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좋은 마음으로 후원을 결정한 것이다. 헌데, 마음이 헛헛하다. 나는 돈으로 이 아이와의 인연을 구매한 것인가? 이 아이보다 조금 더 금전적으로 풍요하단 이유로 스스로가 '나는 후원도 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우쭐대고 싶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정신적인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시작한 걸까? 내가 이 아이와 정신적 교감을 원한다면, 이 아이 또한 그것을 원할까? 이 아이와 편지를 주고 받고, 만남을 갖는다고 하면 그것이 정말 이 아이에게 내가 도움을 주는 일인 것일까? 내가 이 아이라면, 후원자의 자기소개 편지가 의미 있을까? 후원자에게 보내는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이 아이는 알까?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게 서 있던 이때의 마음은 어땠을까?
컴퓨터 클릭 몇 번으로 얕게 결정한 국내 결연은, 결연 아동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깊은 자괴의 늪에 빠졌다. 편지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쳐다봤다. 나는 '결연 아동과의 유대'라는 후원의 대가를 바란 것이다. 내가 한 후원으로 듬직하게 잘 자라준 아동의 모습. 그 아동에게 가끔씩은 맛있는 걸 배불리 사주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뿌듯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원은 어떠한 대가를 원하지도, 받지도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라는 것은 또다른 기대를 낳고, 대가라는 것은 또 다른 대가의 지불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이 작은 후원이 그 작은 아이에게 어떠한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는 작은 기도를 드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가끔씩 좋은 책들을 선물해, 스스로가 만족하는 것으로 그 후원의 대가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편지지를 찢었다. 후원자로서의 역할은 이것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