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올려본다. 기존에 올렸던 글과는 성격이 다른 내용이지만 최근 내가 심각하게 고민해본 부분이기에 브런치에 글을 올려보고 나의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고 다소 불편한 시선을 느끼는 분들께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한국 현대사, 특히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지금까지도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공존하는,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다. 어떤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각은 극명히 엇갈린다. 최근 나는 주변 지인들이 다큐멘터리 "건국전쟁2"를 감명 깊게 봤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이들은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며, 우리의 역사가 좌파 성향 역사관에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1. 이념의 프레임, 이제는 벗어야 한다
냉전이 종식된 지 3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는 좌우의 이념 구도에 깊이 매몰되어 있다. 나는 '좌파'와 '우파'라는 구분 자체가 일종의 관념에 불과하다고 본다. 개인의 시각과 경험은 저마다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도 제각각이다. 그런데도 특정 사건과 인물을 좌우의 이념적 프레임을 씌워 평가하는 것은 깊이 있는 역사 인식을 가로막는다고 본다.
건국전쟁2의 김덕영 감독이 "편향된 역사 인식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다루고자 했다"는 말에는 일정 부분 공감한다. 나 또한 하나의 시각이 아닌, 다양한 관점을 포용하는 태도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념적 프레임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균형 잡힌 이해가 필요하다.
2. 제주 4·3 사건, 이념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제주 4·3 사건을 단순히 남로당의 무장반란을 진압한 사건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 중에는 남로당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무늬만 남로당원'이었던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 비극을 단지 정치적 이념으로 덮어서는 안 된다.
희생자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박진경 대령처럼 남로당 스파이에 의해 암살된 인물도, 아무런 이유 없이 학살당한 민간인들도 모두 비극의 희생자다. 이념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사람의 생명이고, 억울한 죽음이다.
3. 이승만, 공과 과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유상 몰수·유상 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의 안보와 산업화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이러한 토지개혁은 한국전쟁 당시 국민들의 체제 지지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제주 4·3 사건, 보도연맹 학살,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4·19 혁명 등 많은 사건에서 그의 책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들은 변명일 뿐이고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합리화할 수 없다. 지도자는 책임을 지는 자리다. 그의 공은 인정하되, 과오는 반성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다.
4. 남로당, 단일한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
정당에는 늘 적극적 활동가와 명목상의 당원이 공존한다. 지금도 권리당원이라는 이름으로 당비만 내는 사람과, 정당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이 나뉘듯이, 당시 남로당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문맹률이 높았던 해방 직후, 단순한 계급 해방이나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남로당에 가입한 이들을 모두 반국가적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게다가 해방 직후 남한 사회는 지금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제헌헌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적 연대와 분배를 강조했던 점을 보면, 당시 대중의 정치 성향이 지금보다 왼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저 미군정의 통치가 또 하나의 외세 침략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군정에 반대한 이들도 존재했다.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겠다는 시선에서 사회주의는 어떤 이들에게 끌리는 사상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남로당을 단순히 북한 추종세력으로 동일시하는 시선은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현재의 시선이 아닌, 그 시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5. 분단, 누구의 책임인가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이승만에게만 돌리는 것도, 전적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도 곤란하다. 1946년 정읍발언에서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처음 주장했고, 이는 분단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데 영향을 주었다. 물론 그에게는 당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에 대한 위기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라를 위한 판단이었는지, 아니면 개인 정치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한반도의 분단이 전적으로 이승만 때문이라는 시각은 지나치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끝까지 북진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종전협정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한반도 분단의 원인은 다양한 요인이 있을 것이기에 이승만 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6. 친일 청산의 실패와 그 배경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친일 부역자들의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한국 현대사의 오랜 상처다. 일제강점기에 행정 경험이 있던 관료들이 미군정에 의해 다시 기용된 현실은 행정 공백을 최소화하려는 실리적 판단이었을지 모르나, 도덕적으로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남북 간 체제 경쟁이라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라는 기준으로 인물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이 모순이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결과 역사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양가적이다.
맺으며: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공과 과를 함께 보는 눈
대한민국은 여전히 해방 공간에서 형성된 좌우의 적대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은 좌우로 나뉘고, 시민은 그에 따라 '빨갱이'니 '친일'이니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이념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때다.
과거의 인물과 사건을 평가할 때는 이념이 아니라 사실과 맥락, 그리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모든 인물에게는 공과 과가 있다. 공은 인정하고, 과는 반성하되, 그것이 이념을 위한 왜곡이어서는 안 된다.
역사란,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부디 우리 사회가 이념을 넘어 성숙한 역사 인식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