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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타자화, 어린이 미술관의 역설

어른의 시선으로 구분지어지는 아이의 세계

by Leading Lady

최근 미술관의 역할이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과거 미술관이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빙에 주력했다면, 오늘날에는 지역사회의 문화적 플랫폼으로 기능을 넓히면서 그 문턱을 낮추고 있죠. 콘텐츠 측면에서도 진입장벽을 허물려는 노력이 두드러져, 과거에 교육받은 성인만이 즐길 수 있었던 전시에서 벗어나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모두를 위한 교육 기관이자 놀이터로 변모했습니다. 특히 어린이에 대한 개방성은 놀라워서, 이제 대부분의 미술관이 '키즈 프렌들리' 콘텐츠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아이와 함께 종종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며 아이에게 적합해 보이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곤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 자신이 미술관에 가는 목적이 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곳에 어떤 전시가 열리는지보다, 우리 아이가 참여할만한 교육이나 도슨트 프로그램이 있는지, 어린이 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게 된 것이죠.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미술관이 나와 아이의 소중한 주말을 빼앗고 있지 않은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 말입니다.


예술의전당 1101라운지 프로그램 참여 모습. 재료를 마구 써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경계, 어린이를 위한 미술관의 역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1984)는 근대적 주체가 자신과 타인을 구분짓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고 말했습니다. 성인 중심의 사회에서 아이는 종종 이러한 구분의 대상, 즉 '타자'가 됩니다. 우리 사회가 아이를 타자화하는 방식은 일상적 차원에서부터 제도적 차원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아이니까"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순간들이 있다. '어른들의 대화'라며 아이를 일상적 소통의 과정에서 배제하거나, 아이의 감정적 반응을 '철이 들면 나아질 일시적 상태'로 치부하는 태도는 아이를 나와 같은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사례들입니다. 상업 공간에서 '노키즈존'을 설정하는 경우, 정치적으로는 '미래의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이 현재의 시민으로서의 법적·정치적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도 제도적 차원의 타자화라 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의 '어린이 전시실' 혹은 '어린이 체험 공간'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을 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눈높이와 신체적 특성을 고려한 배려의 표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지한' 예술 공간과 아이들의 공간을 분리하고 아이의 감상과 참여를 별도의 프로그램에 격리하여 문화적 계층을 만들기도 하죠. 이러한 분리는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특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아이의 예술 감상을 '본격적인' 예술 활동과 구분하는 경계를 제도화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전시장의 소음과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분리가 이해되는 측면이 있지만, 국공립을 필두로 대부분의 미술공간이 이러한 분리를 당연시하는 것은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만약 신체적 특성만을 근거로 '장애인 전시실'을 별도로 마련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본다면, 이러한 구분이 아이를 어떻게 문화적 타자로 만들고 있는지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어린이 미술관이나 전용 프로그램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배려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경계가 너무 견고해져서 서로의 세계를 넘나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처럼 인식된다면, 우리는 그 목적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새 일반 전시장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질문은 소음이 되었고, 반대로 어린이 미술관은 어른들에게 낯선 공간이 되었습니다. '어른의 공간'과 '아이의 공간'의 이분법적 구조는 아이들의 요구라기보다는 성인의 편의가 우선시된 결과일 것입니다. 아이를 미숙한 존재로 구분하는 대중의 시선, 그에 따른 양육자의 불편함, 그리고 동질의 집단 속에 존재할 때의 안정감으로 인해,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새 서서히 '우리가 아는 미술관 공간'에서 아이를 분리해 낸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서로에게 새로운 창(窓)이 되어주는 것임을, 그것을 도와주는 미술관의 풍경을 다시금 그려 봅니다.



[참고문헌]

- 베리타스알파 편집부, 「감시와 처벌(미셸 푸코)」, 베리타스알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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