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녀의 편관대운 길들이기

관성과 무관사주

by 미온


세상의 모든 ‘좋은 여자’는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말을 아끼고, 눈치를 보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손끝의 떨림마저— 우리는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다. 사주명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은 여성에게 있어 ‘이상적인 남자’이자 동시에 ‘이상적인 여성상’을 강요하는 힘이다.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이자, 나를 가두는 경계. 내가 사랑받기 위해 갖춰야 할 ‘정숙함’과 ‘단정함’이 나는 오랜시간 참 싫었다.



관성적으로 끌리는 관성

사주팔자를 풀다보면 '관성'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관성은 보통 나를 억누르는 성분을 의미한다. 이 억누르는 성분은 정관과 편관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정은 바를 정()자를 쓰고, 편은 치우칠 편(偏)자를 쓴다.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관성은, 오늘날 직장 및 커뮤니티를 의미하고, 여자에게는 남자 및 남편복을 나타낸다. 쉽게 말해, 나를 억누르지만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가령, 정관으로 기능하면 푸근하고 묵직한 좁쌀이불과 같이 불편하지만 묘한 편안함을 준다. 마치 묘목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판자를 덧댄 것처럼, 다소 나를 극하는 기운이지만 동시에 안정감을 주는 기운이기도 하다. 이는 튼튼한 '나무 울타리'나 잘 길들여진 '진돗개'로 작용하여 내 바운더리 내의 오가는 기운들을 관리해서 나만의 영역을 더 공고히 해주기도 한다. 정관이라는 글자를 갖고 있는 사람은 보통 원칙주의이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에 잘 적응하고 수행해나간다. 덕망을 볼 수 있는 글자이나, 너무 과하면 융통성이 결여되어 인간미 없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일지 관성을 가지고 있는 A는 상급자가 원하는 바운더리에 들어와 있는 것에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녀는 어떤 폼(Form)을 던져주면 그에 데이터를 채우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해낸다. 실제로 그녀는 월지 편재로서 관성을 잘 사용하던 사람이었는데, 무식상에 디자인 대학을 나와서 매니징 일을 했지만 결국 그녀가 몸담은 조직에서 인정받았고, 사회생활한 지 5-6년이 될 무렵 팀장을 달았다.


한편, 편관으로 기능하면 이 울타리는 '전기 울타리'로 바뀐다. 진돗개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늑대'가 된다. 나를 지킬 수 있는 성분이지만 동시에 내가 심하게 다칠 수 있다는 리스크를 안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 편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카리스마를 통해 멋진 결단력을 내는 사람이다. 다만, 모험심과 의협심이 과해서 고난도 함께 따르는 팔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편관을 잘 길들이려면 나라는 본원 글자가 강하거나 (신강), 편관을 잘 길들일 수 있는 무기(인성, 식상)들이 필요하다.

B는 일지 편관이 강한 사주로 태어났다. 특히 시지와 월지가 편인이므로 살생인 구조가 되었다. 살생인구조는 편관의 힘을 더 강하게 한다. B는 여성임에도 대장부 기질을 갖추고 있다. 아무런 악의 없이 생긋 웃는 그녀를 봐도 카리스마를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녀와 함께하던 그 시절에는, 팀장님 마저도 그녀의 무력이 포함된 장난에 기를 못 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는 포용력과 책임감으로 그녀가 이끄는 프로젝트는 늘 힘든 클라이언트와 함께였으나 늘 좋은 결과를 맺었다. 일지 편관은 나를 억누르는 외부 압력, 통제, 책임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배우자를 만나는 것과도 같다. 실제로 그녀는 자기 확신을 갖고 뚝심있게 프로그래밍해야하는 개발자와 결혼하였고, 그녀는 결혼생활에 있어 그의 뚝심에 맞춰주려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관이 상하는 경우도 있다. 정관 옆에 관을 상하게 하는 비겁이나 상관이 있으면 그렇다. 관성은 원래 나를 통제하거나 제어하려는 존재다. 그런데 비겁이 강하면 관성을 극(剋)하여 통제를 거부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식의 구조가 되는 것이다. 또, 상관이 강하면 규칙에 대한 도전과 불만을 가감없이 표출하는 구조가 된다. 말로서 조지는(?) 것이다.

일월지 관성이나 시지에 비겁을 갖고 있는 친구 C는 남자친구와 길게 연애하여 그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알면 알수록 꽤나 *테토남스러웠다. 그는 우선 남자 고등학교 수학교사이므로 서열에 민감한 남고생들 사이에서 리더십과 그에 맞는 권위를 가져야만 했다. 더불어 넘치는 양기를 주기적으로 발산하기 위하여 마라톤을 하곤 한단다. 집안에 어떤 물건을 들일때에도 남편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하는 등 크고 작은 결단을 남편이 스스로가 해내야 직성이 풀린다고. 이 시대에 남성적 성향이 강한 남자를 고른 C는 당연히 스트레스가 많을 수밖에 없다. 아주 심각하진 않지만 크고 작은 투닥거림은 피할 수 없을것이다. 비겁이 관성을 극하면 관성을 직접 극하므로, 힘으로 대립하는 구조니까 말이다.

테토남은 생물학적 수치와는 무관하게, 사회적·행동적 특성에서 남성적인 자질이 강하게 드러나는 남성을 뜻한다.



저는 이와 무관합니다

나는 '무관'이다. 앞서 장황이 말했던 관성이 내 사주팔자에서는 없다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정해진 울타리를 인식할 수 없으니 많은 것들을 후천적으로 습득하지 않으면 자칫 무법자가 될 수도 있다. 무관은 극단으로 간다. 울타리가 없으니 이 세상 전체가 내 땅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공식으로 세상 남자들 혹은 직장의 인기를 얻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은 조금 어이없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틀린 얘기는 아니다. 무관은 어찌보면 문제가 생긴다. 직장의 문제와 연애의 문제가 그럴 수 있겠다.


우선 직장으로는 적성이나 진로를 찾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실제로 나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도전해왔고 다재다능하다는 소리를 습관처럼 들어왔으나, 하면서도 늘상 그에 대한 확신으로 정착하여 진득하게 운영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진정으로 어떤 것을 하고 싶었는지 방황했던 적도 많다. 그러면서도 상사의 지시나 간섭이 부담스럽다. 나는 학창시절에는 실제로 아버지에게 학교 성적에 대한 관심과 간섭을 많이 받아왔는데, 그에 순응하기보다는 맞받아치는 것이 강해 (상관이 희신인 사주이긴 하다. 상관은 관을 상하게 하는 성분인데, 나중에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겠다.) 결국 싸움으로 끝을 맺으며 나에게 지나친 압박감을 주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 직장을 다니고 무던해지는 시기가 있었는데, 이는 편관대운이 들어와서였던 것 같다. 이직을 곧잘했으나, 사실 좀더 눈을 높여 대기업이나 공기업을 갈 법도 한데순간순간의 결정에 집중하느라 거시적인 목표를 세우고 나 스스로를 올려치지 못했다.


또 남자를 만나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사주를 보러 가면 열이면 열 남자복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며, 결혼은 최대한 늦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디폴트였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빨리 결혼해서 안정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기본적으로 경험이 자산이 된다는 신념이 깔려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나도 잘 적응할거라 생각해서 20대 때에는 잦은 만남을 가졌다. 가부장적 남자를 만나 눈에 쌍심지를 켠 적이 여럿 있었고, 어떤 남자는 주변에 여자가 많아서 골치아픈 일들이 생겼다. 또 어떤 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다소 다혈질이라던가,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을 만나 바닥을 친 적도 있었다.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나는 나대로 남자를 보는 기준을 쌓아갔던 것 같다. 사주쟁이의 말대로 결혼을 늦게하진 않았지만, 실전 압축 경험을 통해 극복해나갔다고 생각한다.


이런 나에게 20대 후반부터 편관대운이 들어왔다. 대운은 10년단위로 나의 사주에 들어와 영향을 주는 운을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도 천간 편관 대운은 나의 사주에 따라 크고 작은 이슈가 발생할 수 있는 운이다. 편관은 정관보다 더 강압적이고, 예측 불가한 압박을 준다. 그런데 무관사주는 원래 그런 강한 에너지를 다루는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겪는 통제로부터, 위기의식을 느끼며 그에 대한 분발과 내외부적 갈등이 혼합될 가능성을 추측해본다. 아마도 사람과의 관계부터 건강상의 문제, 관재구설도 오를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성은 여전히 아름답다. 누군가의 신뢰를 얻는 방식, 책임을 다하는 태도, 내가 선택한 질서 속에서 스스로 빛나는 삶— 어쩌면 진짜 성숙이란, 그 ‘관성’을 내 편으로 만드는 기술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안다. 내가 관성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그 안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정해준 삶’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지켜주려는 척하면서도 나를 숨막히게 하던 그 틀을, 나는 어느새 사랑받기 위한 조건처럼 받아들여 왔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내가 선택한 책임, 내가 원하는 관계, 내가 정의한 단정함. 이제 관성은 더 이상 나를 억누르는 무게가 아니라, 나를 지탱하는 구조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질서를 좋아하고, 신뢰받고 싶으며,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 다만, 그 ‘좋음’의 기준이 나의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사주 물상은 흙과 햇빛 없이 고요한 끝없는 얼음 호수와 비슷하다. 그런 곳에 관성이 들어온다는 것은 곳곳에 높은 산과 흙이 솟아오른다는 것과 같다. 끝을 알 수 없던 무용한 호수는 웅덩이로서 유용한 틀이 만들어질것이다. 20대 마지막 끝자락에서 나는, 평생의 짝사랑이 될 소중한 아들을 낳게 되었다. 통제로부터 권위와 책임감이 갑자기 들어왔다는 것이 얼추 들어맞는 격이다. '엄마'에 대한 틀이 지각변동하여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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