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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프레스 Nov 05. 2020

떠나

"걷다 보면 생각이 난다"

좀처럼 떠날 수 없는시기엔  떠난 날들이 떠오르고

매번 어딘가로 떠도는 일정일 땐 고정 업무를 고대한다.

사람 마음이, 아니 나의 마음이 너무 간사해서

늘 그 반대의 상황을 생각한다.


여행을 말할 때 갈 수 없는 이유로 나오는 흔한 이야기도

마찬가지.

시간이 있을 땐 돈이 없고 돈 있을 땐 시간 없다.

경제적 여유와 심적 안정이 함께 가지 않는 걸까.

성격마다 상황마다 다르긴 할 것이다.


지지난해 스페인 순례길을 소재로 한 무용을 본 적이 있다.

제목. 마크툽. 모든 것은 이미 예정돼 있다.

파블로 코엘류의 연금술사, 가수 이름 등으로도

알려진 용어. 순례길이 소재란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긴 했고,

실제로 박호빈 안무가가 순례길을 다녀와서

만든 작품이라, 작가의 체험이 녹아든 공연이었다.

출연 무용수들은 

각기 자신만의 독특한 여행 분위기 캐릭터가 있었고

그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현실의 짐에서 벗어나려는 듯 했고

누군가는 꿈을 꾸고

누군가는 주변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어떤 이는 우아하고 어떤 이는 코믹하고

제각각 특색을 지닌 개인 무용수들 성향이 보였다.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요상한 코고는 소리와,

유령처럼 순례 도중 체류해 버린 듯한 사람의

이미지였는데 

(무대를 떠나지 않고 뒤편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미지.

지금 기억은 그렇지만  공연의 찰나적 기억상

다른 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뭐랄까. 자신을 찾으려고 간 숭고한 곳에서도

어쩌면 그곳에 영원히 표류해버리거나 그 안에서도

그대로 순례 자체에 갇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  생겨서  인상에 남았다.

순례길의 노숙인,이라고 혼자만의 소제목을

붙여보고 단어로 보자면 생뚱맞지만

동의어 반복이라고도 생각했다.

길 위를 떠난 사람이 길 위에 머무는 건 너무 당연하니깐.


그리고

맥락은 다르지만

윤종신의 <떠나> 노래의

도시의 유령 되지 마요, 라는 멜로디가 맴돌았다.

가요에서는 떠난 곳이 아니라

떠나기 전 번아웃 상태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떠올리게 했지만,

무용을 보면서는 어느 순례길의 떠도는 이미지가 생각났다.


'떠나' 역시 지지난해 발매된 곡인데,

여름에 그 곡을 듣고 가을에 그 무용을 보고

그해 늦가을 문득 출발 바로 직전 주 세일가 표를 끊어

인터파크 동유럽 패키지 여행에 다녀오기도 했다.

특가로 끊었다고 좋아했건만 가서 보니

몇 달 전에 끊은 사람들이 더 저렴하게 도착했다.

어쨌든 갑자기 붕 뜬 일정이 생기면서 떠난 그곳.

코로나 시국 전 가장 가까운 여행이기도 했다.


자꾸 떠올려서이기도 하겠지만

그 여행의  기억은 꽤 강렬하게 오래 갔다.

불쑥 떠난 장소들은 더 많이 애착이 가기도 한다.

계획하고 갔던 곳은 미리 찾아보다 보니

먼저 눈앞에 다가올 일정과 경로를 그려보는데,

무계획 돌발 마주침은 순간순간이 새롭다.

가는 곳곳에서 가장 끌리는 곳들만 찾다 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자신을 좀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마크툽 무용을 보면서,

나라면? 순례길에서 어떤  모습일까,

어떤 생각을 할까, 끌어서 떠올려 보기도 했었는데,

걷는 것을 좋아하고 낯선 풍경을 발견하는 것에

좀 거부감이  없는 편이라,

모르는 길인 것 자체로 행복해,

그냥 붕 뜬 상태이려나.

표현한다면  그냥 극장 천장, 바텐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렇게 객석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연을 본 후엔 우연히 반가운 예술가를 만나

또 인형극을 보았다.

그때 예술가와 함께 마신 맥도날드 커피도

여행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외국 도시에 방문하면 꼭 맥날 커피를 마셔보는 습관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그때 그 예술가는 가까운 이가

스페인 순례길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해주었고

나는 그 가까운 이와 차를 타고 갈 일이 생겨

그때의 체험을 여쭤 보았다.

그분의 얘기를 들어보니

걷는 것 자체에 집중해서  오히려

잘 먹고 잘 자고 규칙적으로

건강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했고,

아름다운 길가 풍경 곳곳이 잊히지 않는다 했다.

아마도

인간 본연의 기본 패턴을 깨닫고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잘 걷고 먹고 주변을 사랑하고.

특히 체험담에서 재미있던

모두 동일하게 걷는 방향이 있는데

간혹 길 위에서 빛도 바람도 다소 불리한 방향 편으로

역주행하는 사람들을 봤다는 사실.

이미 순례길 선택 자체가  개성이 좀 강한 분들의 초이스 같았는데, 심지어 역행이라니,

그또한 아이러니하게 느껴져 한참을 웃었다.


언젠가 나도 한번은 떠나고 싶은데

지금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길 위에, 날짜를 끊어서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십 년 전부터 해놓곤 아직도 못 갔다.

그래서 어쩌면 맘만 품고 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끝에. 오늘밤 본격적으로 서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익히 걸어 왔지만 좀 의미 있게

그 순례길 무용수들처럼 든든하게 옷을 따뜻하게

갖춰 입고, 단 짐은 들지 않은 채 일단 걸었다.

나는 하정우 걷기 학교 팬이기도 해서

이미 핏빗, 피트비트를 차고 있고

걸음수를 늘 염두하며 걷는 사람이기도 하다.

왠지 그 길 위에서 배우 하정우이자,

걷는 사람 하정우 책의 저자를 우연히 스쳤거나

스칠 수도 있다는 꿈을 꾸기도 한다.

나를 들여다보는 걷기!

나로선 순례 춤이 되진 않아도

'뭐라도 되겠지'(김중혁 작가 책 제목이 돼버렸다.)


지지난해 불쑥 떠난 여행에서는

윤종신 신간과 카프카 이북,

음악 한 곡 떠나를 고이 들고 갔다.

여행에 대한 예의랄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간의 첫 페이지를

낯선 나라, 이국의 방에서 열고 싶었다.

계절은 너에게 배웠어는 오스트리아에서 읽고

떠나는 체코에서 내내 들었다.

그런 게 은근히 운으로 작용했는지,

체코 일일 관광 가이드로 나타나신 분이

틈틈이  윤종신 얘기를 했다.

뭉쳐야 뜬다에 출연한 바람에

그 기억을 말하고 있어서 은근히 재미 있었다.

그땐

한 곡만 듣겠다는  결심으로 갔지만,

와이파이 잡히는 곳에서 여러 유혹을 받고

또 몇 곡을 내려 받기도 했다.


지금 당장 먼 곳으로 떠날 순 없어도

언제나 떠날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고 살고 싶다.

떠나를 듣다 보면 또 떠나고 싶다.

스페인 순례길은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의 순례길 800 킬로를  채우고자

이런 생각 도중 저녁 헬스장 대신

(요새 헬스장 전염 사례도 또 나타나서 ㅠㅠ)

다른 곳을 걸어 보았다.

그리고 끊어서라도 걸어 보겠다고,

거리를 측정해 보았다.


오늘 걸은 거리는,

드라마 덕후인 정체성으로 시작.

도깨비에서 이동욱이 유인나를 처음 만난 육교다리

지점에서 출발했다. 청계천 끝자락.

곧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물의 교차로이다.

딱 만 보를 걸으니 한강변을 따라 한남대교가 나타났다.

굴방을 따라 계단을 오르니

한남동 삼거리가 나왔고

그 지점에서 따릉이를 타고 보광동 언덕을 지나

녹사평, 이태원, 한강진 역을 마지막 스팟으로 삼아

집에 돌아오니 14 km였다.

군데 군데 공연의 기억이 남은 곳들였다.

이렇게 걸으면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의존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또 매듭 짓고

꿈꿀 수 있으리란 용기가 생겨났다.


800km 서울 내외를 스페인 순례길이려니 생각하고

코로나 시국 산책을 떠나야겠다.

걷다 조금 피곤하면 따릉이를 타고

다시 걷다 돌아와 길 위에서 둥둥 생각난

좋은 기억에 실려 휴식이 되는 시간을

갖고 싶어졌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걷다 보면 생각이 난다."

이건 심수봉 노래 가사인, 아니 배인숙 ;

서울 순례 시작 1일 코스. 한강 중랑천 청계천 물길 따라 10km
마크툽 무용 포스터
월간 윤종신 2018.8 떠나
가사 구절구절 맘에 와닿는, 떠남을 부추기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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