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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jung KIM Nov 04. 2022

팔짱을 끼지는 않고

책에 관한 기분들 2


 마트료시카 인형을 연다. 똑같이 생긴 인형이 나온다.

 

 그저 당신과 책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다. 실은 어깨가 닿을락말락한 거리를 유지하며 함께 걷는 게 좋았는지도 모른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만나는 모임이었다. 땀에 전 머리칼, 치석 낀 치아, 어디를 봐도 호감을 주는 외모는 아니었다. 게다가 잠자코 있는 순간이 많아 모임을 한창 하다 보면 그가 있다는 것조차 곧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를 제대로 본 건 희곡 <닫힌 방>을 읽던 칠월 저녁이었다. 지옥에는 뭐가 없을 것 같아요? 모임에서 달변가로 통하던 남자 진행자가 막 질문을 한 참이었고, 다들 “맥주” “넷플릭스?” “게임” “남자!” 등등의 키워드를 던지며 재치를 뽐내고 있었다.

 “지옥에는 책이 없죠. 책이란 타자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니까.**”

그가 나직하게 말했고, 일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진행을 맡았던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웃음으로 그 순간을 얼버무리며 넘겼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마트료시카 인형을 연다. 그 안에 다시 작은 인형이 나온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았던 우리는 모임을 마치면 늘 함께 지하철을 탔다. 그가 화정에서 내릴 때까지 40분간은 둘이서 실컷 책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이런 대화가 가능해? 가능하구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팔짱을 끼지는 않고, 유별나지도 않게, 하지만 아주 가까이, 당신과 함께 걷기.

_프란츠 카프카, <꿈>에서

 

 나는 퇴사 후 에어비앤비로 파리에 방 하나를 예약했다. 연말 분위기가 한창이던 거리를 쏘다니며 노점들을 구경하다가 분홍빛 뺨에 에이프런을 두른 러시안 인형을 만났다. 인형 바닥에 ‘1.3유로’라고 적혀 있었다. 2천 원도 안 되는 선물이라면 괜찮을지 모른다.

 여행지에서 선물을 사는 일은 내내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다닌다는 말이다. 하지만 수트케이스 귀퉁이에서 포장이 찌그러진 채 3주간 나와 동행하던 그것은 귀국 후 그대로 서랍 속에 처박히고 만다. 건넬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따로 선물을 챙길 만한 사이가 아니었므로, 무심하게 “지나가다 보여서 샀어” 하며 줄 수 있는 기회도 없었으므로.

 

 마트료시카 인형을 다시 연다. 새끼손가락 절반만 한 인형이 그 안에.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추는 클럽 ‘Silent Night’은 밤 11시 10분부터 시작되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리라. 야심찬 다짐을 하며 조명이 어지러운 나이트클럽으로 들어섰다. 외투와 가방을 맡기고 번호가 적힌 종이쪽지와 헤드폰을 받았다. 헤드폰을 쓰자 댄스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는 구석에 몸을 기대어 서서 맥주를 홀짝거렸다. 20분쯤 지나자 게이 한 무리가 다가와서 함께하자며 흥을 돋운다. 한 남자는 내 손을 잡아끌며 무대 중앙으로 데려가기까지 한다. 나는 그 분위기에 섞이지 못한다. 손사래를 치며 무대 밖으로 나온 뒤 벽에 기대 휴대폰을 확인했다.

 12월 31일 23:55의 sns는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지난 발제자였던 L이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축하인사와 장난기 섞인 야유가 댓글창에 줄줄이 달렸다.

 아바의 ‘댄싱퀸’이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나는 조용히 벗었다. 음악이 사라지자 침묵을 휘저으며 몸을 흔드는 사람들이 묘하게 슬퍼 보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냈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실망을 읽지 않았습니다. 나는 꿈의 경악을(사람이 편한 척 행동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어떤 장소이기도 합니다)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경악은 깨어 있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내 안에 있습니다. 나는 어둠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나는 태양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_프란츠 카프카, <꿈>

 

 마트료시카 인형을 다시 연다. 아마도 마지막일 인형이 나온다.

 이제 더는 너를 열 수 없다. (by 밤의점장)


**사르트르, <닫힌 방>, p.18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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