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D

13. Philosophy of Death

by 아보카도나무

샤워하기 전에 문득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이 참 죽음의 철학의 가운데 있네' 라고.

그런데 그 순간, 대학교 1학년 때, 멋모르고 '죽음의 철학'이라는 수업을 듣고 나서, 의대를 못 갈 뻔한 기억이 떠올랐다 (절망적인 GPA 또는 내신 점수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나는 대학교 4학년이 끝나고 의대에 바로 진학하지 못/안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끌어안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철학'은 나에게 미지의 세계이자 신기한 존재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고, 소피의 세계*를 읽고 나서 그 마음은 더 커졌다. 책 속에서 철학적 사유와 삶에 대한 깊은 질문들이 펼쳐지는 걸 보며, 나도 언젠가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철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껴 기본적인 철학 코스를 듣는 대신, 좀 더 고차원적인 코스를 신청했다. 바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철학 코스였다. 기본 철학은 내가 미디어에서 듣고, 소피의 세계에서 얻은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때는 철학적인 문제보다는 '죽음'에 관한 철학자들의 생각과, 그들의 사유가 어떻게 펼쳐지는지에 더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막상 수업을 들으면서, 이 코스가 내가 생각한 방향성과 전혀 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학보다는 오히려 논리학에 가까운 내용들이 많았다. 내가 기대한 것은 철학자들이 어떻게 죽음을 다루는지, 그들의 생각이 어떻게 진화하고,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실상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난 몰랐다. 그런 코스에서 점수가 안 좋을 것 같으면, 드롭(drop)을 할 수 있다는 걸.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난 끝까지 버텼고, 결과적으로 정말 힘든(=사상 최악의) 점수를 받았다. 첫째 주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 다음 주에는 정말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때는 그것이 '드롭'이라는 선택지인 줄 몰랐기에, 나만 꾸역꾸역 남아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의대 쎄-굿바이 할 정도의 파워를 가진 점수였다.



다행히도 의대마다 점수 평가 방식이 달라서, 다른 학교에서 이 점수를 보고 판단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어떤 학교는 마지막 2년의 점수만 보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제일 잘한 2년만 반영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학교는 전체 학년 평균을 보는 방식이었다. 심지어 석사나 박사를 수료한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다행히 그 점수가 내 인생을 완전히 망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아보면, 그 '죽음의 철학' 코스에서 기억나는 건 사실 하나도 없다. 꽤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도, 그 수업에서 배운 내용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내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건 내가 온전히 나로서 이 생을 마무리짓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 자신이 더 이상 '나'가 아니라면, 나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결국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순간,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나'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끝내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중요하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면,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조차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나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서 어떻게 내 생을 끝낼 수 있겠는가.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내가 나로서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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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 Grotto canyon 벽화 (500-1300 년 추정- Hopi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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