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의 슈킹 1 > 에서 이어집니다.
12월 27일 (목요일)
J은행의 청원 경찰이 정문에 셔터를 올렸다. 시계는 오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복사장은 은행 안으로 들어가 출금 용지에 10억 원을 적어 창구에 내밀었다.
“이 돈을 인출해 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때 지점장이 다가와 차 한 잔 하자며 복사장의 손을 이끌어 소파로 갔다. 그는 이 은행의 VVIP 고객이었기에 지점장은 서둘러 커피를 내왔다. 창구 여직원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고 출금 키를 눌렀다. 그러나 잔액이 0원으로 표시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로 자판을 잘못 눌렀다고 생각하며 다시 계좌번호를 입력했지만, 역시 0원이었다. 입출금 내역을 확인해보니 어제 날짜로 입금된 10억 원이 자정 무렵 5억 원, 오늘 새벽에 5억 원이 인터넷 뱅킹으로 빠져나갔다.
“어, 이상하네?”
여직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평소에는 항상 억 단위 이상의 잔고가 있어서였다.
“지점장님, 큰일 났어요!”
“뭔데 호들갑이야. 돈이라도 증발했어?”
“네, 돈이 사라졌어요! 10억 원이 없어졌어요!”
“뭐라고?”
지점장은 벌떡 일어나려다 무릎으로 탁자를 쳐서 커피 잔이 공중으로 튕겨 올라가며 복사장의 얼굴에 커피가 쏟아졌다.
“아, 뜨거워!”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팔짝팔짝 뛰었다. 그것도 잠깐, 두 사람은 여직원의 자리로 달려갔다.
“보세요? 0원이잖아요.”
여직원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복사장과 지점장은 경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빨리 경찰과 금융감독원에 연락해!”
지점장은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순간 은행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같은 시각, 다른 여러 곳의 은행에서도 혼란이 일어났다.
수일금융은 잔고증명 의뢰인인 구상일을 남대문 경찰서에 사기로 고소했다. 곧 다른 잔고업체들도 고소를 이어가며 30억 원이 추가로 접수되었다. 경찰은 40억 원 규모의 신종 사기 사건으로 즉시 수사를 시작했다. 사실은 명동의 큰손인 전주들이 경찰서장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사건 발생지가 명동이라 관할은 남대문 경찰서로, 전부터 전주들과 유착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경제범죄로 분류되어 지능팀이 맡았고, 평소보다 많은 형사가 투입되었다. 가장 먼저 소환된 용의자는 상일이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용의자들은 잔고증명을 서류로 의뢰했고,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는 현우 사무실의 선불폰으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남대문 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의 정구원 형사입니다. 구상일 씨 맞으신가요?”
“네, 그런데 무슨 일이죠?”
“수일금융에 잔고증명 10억 원을 의뢰하셨죠?”
“잔고증명요? 저는 대출 실적을 쌓으러 간 것뿐인데요?”
“어쨌든 그 사건과 관련해 경찰서에 나와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상일은 서류에 실명 전화번호를 적었다. 만약 연락이 되지 않으면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건의 정황상 상일은 현행범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그의 인적사항을 수일에서 받아 주소지로 검거하러 갈 것이다. 그러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하면 전국에 지명 수배를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범죄는 사기 편취액이 5억 원 이상으로, 특가법이 적용되어 공소시효가 10년이다. 이 기간 동안 도망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해외로 도피할 경우는 다를 수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에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그곳에 머무는 기간만큼 공소시효가 연장되기에 실질적인 이득이 없다.
소환 통보를 받은 수일은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이는 작업이 끝난 후 현우와 그가 짠 각본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때 시각은 오후 4시였다.
상일은 2시간 전 동수를 만나 1억 원을, 다시 현우에게 1억 원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상일과의 약속을 지켰다. 두 사람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현우는 향후 시나리오대로 일이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행운을 빌었다.
상일이 수사과에 들어서자마자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이어 미란다 원칙이 고지되었다.
“구상일 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지능팀의 정구원 형사가 구상일 사건을 맡았다. 정 형사는 작은 키와 통통한 체형이었지만, 낮게 지면을 울리는 음성이 카리스마가 있었다. 반짝이는 은테 안경 뒤의 날카로운 눈빛은 상대방을 압도했다. 정 형사의 예리한 시선이 그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내리자, 상일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 적응해야 해!’
그는 가족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구상일 씨, 어제 수일금융에 10억 원의 잔고증명을 의뢰하셨죠? 그리고 그 돈을 전부 빼갔지요?”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지 대출 실적을 쌓으러 간 것뿐입니다. 아침에도 수일금융에서 전화가 와서 형사님과 같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돈을 인출할 모든 서류가 그쪽에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혼란스럽습니다.”
상일은 답답한 듯 가슴을 쿵쿵 쳤다. 이미 정 형사는 복 사장의 진술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 진술에 따르면 상일의 말은 맞았다. 그는 통장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모르고, 수일금융이 보안카드를 가지고 있어 이체는 불가능했다. 또한, 수일이 돈을 입금한 J은행의 CCTV를 확인해보니 인출한 사람은 그가 아닌 여자였다.
‘이건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이거 왠지 한통속의 냄새가 나는데?’
정 형사는 본능적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수일금융은 잔고증명을 하는 업체인데, 대출 실적은 뭔가요?”
“제가 생활이 어려워 다한컨설팅에 대출을 받으러 갔습니다. 거기서 제 명의의 통장으로 실적을 쌓으면 은행에서 대출을 해준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통장만 주면 될 텐데, 왜 수일금융에 잔고증명을 요청했죠?”
“어제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 실적으로는 4천만 원 대출이 어렵다고요. 그래서 통장을 하나 더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주가 자식을 만나러 미국에 가서 그동안 실적을 쌓을 수 없으니, 빨리 대출을 받으려면 수일금융에서 10억 원의 잔고증명을 해 오면 실적에 포함된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상일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역시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그래요? 4천만 원을 대출받는데 수수료는 얼마인가요?”
“4백만 원입니다.”
‘이제 넌 딱 걸렸어!’
“구상일 씨, 10억 원의 잔고증명을 의뢰하면서 지급한 수수료가 450만 원이죠?”
“네, 맞습니다.”
“그 수수료는 당신의 돈인가요?”
“아니요, 사무실에서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왜요?”
“대출업자가 상일 씨에게 4백만 원의 수수료를 받으면서 잔고증명 수수료로 450만 원을 지급했다면, 50만 원이 손해인데, 당신이라면 이런 장사를 하겠어요?”
정형사는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지금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그때는 대출이 나오는 것만 신경 쓰느라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상일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의 모습에 정 형사는 속이 끓어올랐다.
“구상일 씨, 휴대폰 좀 주시겠어요? 대출업자와 통화한 내용이 있죠?”
“이 번호입니다.”
“어제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통화했네요.”
정 형사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연결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 휴대폰은 공중분해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 발신번호의 명의자를 확인하고 구상일 씨의 범죄 경력 조회를 프린트 해서 갖고 와.”
그는 옆에 있던 조 형사에게 지시했다. 잠시 후, 조 형사가 조회 용지를 건네며 속삭였다.
“선배님, 그 번호는 대포폰이고 구상일 씨는 지명수배나 기소중지가 없습니다. 전과는 10여 년 전에 음주운전으로 면허 정지 한 건뿐입니다.”
정 형사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구상일이 사기 전과가 있어야 이를 약점으로 삼아 취조할 수 있는데, 그게 불가능해졌다.
‘근데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형사 경력 20년의 촉이다. 비록 꼴통으로 소문나 동기보다 진급이 늦었지만 그래도 주눅 들지 않았던 것은 사기 사건의 해결사라는 자부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