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계보학

나는 왜 다시 화실 문을 열었을까

by leeari

정말로 'see you'였나 보다.

불과 세 달 전, 그림을 손에서 내려놓겠다며 멋진 척 글을 써놓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민도 망설임도 없었다.

미루고 싶지도, 핑계를 대고 싶지도 않았던

그 유일한 일.

그게, 그림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가공하고

다시 내보내는

'몰입의 시간'을 사랑한다.


그림이든 글이든,

결국은 선으로 이루어진 표현들.

그 안에 나를 눕히고, 조용히 세상에 띄운다.

누군가 닿아와 응답해준다면,

그건 비로소 '소통'이 된다.


아주 오래된 연필박스의 먼지 냄새가

오히려 나를 가장 선명하게 만든다.


더는 잡히지 않는 짧은 연필,

굳은 붓,

물감 자국으로 얼룩진 손톱밑.

그리고 (그림 그리는) '변태' 라는 별명.

이 모든 게 아직도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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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미술 배우기 전과 후, 버리지 않은 어머니께 감사를 표한다.

생각해보면,

그 오래된 그림들—
2001년의 그림대회 상장,

2014년의 대학과제,

2018년의 입시 미술 작업들.

모두 이 길을 가리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운명’이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니.

사실 나는 이 길을 도망치듯 걸어왔다.
그 수많은 갈림길에서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내 안의 목소리를 좇아 고르고 또 골랐다.

그리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번 귀환도, 잠시뿐일 수 있다는 걸.

언젠가 또 무너져,

"3년 만에 다시 붓을 잡았다"는 의미 없는 문장을

다시 쏟아낼자도 모른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 의지였기를 바란다.


지금 당장, 눈앞에 의미 없어 보이는 작업일지라도,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다.

쌓이고, 응축되고,

언젠가 형태를 갖추어 나를 이끌 것이다.


나는 이제 안다.

'완벽주의'는 결코 완성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합격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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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크릴화, 집에와서 디지털 드로잉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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