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팔월의 숲속 어디선가 냇물줄기 속 소리가 빗줄기소리에 섞여 들려올 때면 그때 그곳의 빛살이 다시 새어들었다. 그는 돌계단에 걸터앉아 숲의 색깔보다 더 멀어진 눈빛으로 숲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지막인 줄을 알았다면!)
그는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했을까? 하긴 내가 만든 놀이 속에서만 그를 만나니까 그는 내가 살아있는 날까지 살아있는 거라고, 저 아래, 바닥은 없고 꼭짓점만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원뿔기둥 안쪽으로부터 그는 솟구치며 날 떠받드는 햇살돌기라고. 멀리 떠났던 눈빛을 거두어 그가 흘러가버린 눈빛인 채로 나를 보았다.
“내년 이맘때 다시 만나자….”
추억의 뿔기둥 안을 들여다보면 나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불빛이 가닿지 않는 어둠의 나사 아래쪽에서 나의 그가 솜털촉수을 세운다. 그들 중 검은 점액질로 뭉그러진 부위를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햇살이 들지 않는 빗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너는? 검은 젤리의 시간을 무엇이라고 말할까? 오래도록 감청빛 물속에서 허우적거릴 무렵이니 날마다 내 안에서 새롭게 죽어가는 것들이 많았던…. 무슨 소리가 들렸지만, 반사되고 있었지만 그때는 고개를 돌려 확인할 수가 없었다. 흐르는 시간이 다음 정거장의 이름인 줄 알았다. 여럿이었다가 끝내 하나가 되어버리는 시간의 속성을 뒤늦게야 알았다.
그는 급히 둑의 문을 열었다. 검은 물이 그날 저녁 모서리 끝에 앉은 그를 삼켜버렸다.
죽음이라는 사건도 흘러간다. 집의 들보가 내려앉기 전 지붕을 통째로 안고 그는 바다 한가운데서 사라졌다. 가슴이 둑인 줄 알고 부딪치는 숨소리의 파도가 써억써럭, 무너진다는 말, 그것이 그때 내가 앓았던 증상을 설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진술이다.
그가 어둠 속으로 떠난 후 내 안의 녹아내린 세포들 때문에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일 년… 삼 년이 지나도록 나는 그의 꿈을 만들어 꾸며 내 곁에 그를 남겨두었다. 꿈에서만 살아 있는 그에게 위로받았다. 꿈속에선 여전히 그가 내게 흘러들었고 꿈의 댓돌 근처에서 그는 웃고 있었으니까. 꿈이 세상과 이어져버려 그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쉽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다니며 했다.
(몇 년이 흘러서야 그가 죽었다는 것을 꿈에서도 알게 되었다.)
다시 몇 년이 흐르면서 급히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물을 자주 삼켰다. 혹은 갑자기 물이 불어났다. 나 스스로도 망각에 삼켜지는 줄을 알지 못했다. 내 안의 그를 찾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와 난 길고 휘어진 흰 몸의 꼬리와 몸통쯤에서 우연히 피어난 상사화?
비 그친
마음의 저녁,
어린 친구가
새잎을 물고 날아든
지구의 창가에
피어난 꽃뜰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