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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 이야기집 Oct 14. 2024

나도 알아 !!!!!

뽀송뽀송 내면일기 3

어려서부터 자주 하던 입버릇이 있다. 그건 바로 엄마의 잔소리에 '나도 알아!!! 안다고!!!' 라는 말로 응수하는 것. 진짜 뭘 알긴 알았던 건지, 잔소리 입막음용으로, 방패로써 삼던 말이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희미하다. 분명한 건, 나는 '네, 알겠어요' 하고 고분고분 엄마 말 잘 듣는 순종적인 아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되려, 내 성질을 낼 수 있는 만큼 내야 직성이 풀리는, 다소 호전적인 아이에 가까웠다. 그때부터였을까, 그 꼿꼿한 콩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던 게.


'나도 안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아이는 커서도 바뀌지 않았다. 그 아이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이미 아는 얘기를 똑같이 또 듣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가르치려 드는 것'이라면 질색이었다. 아예 모르는 것, 새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공부이고, 배움이기에 상관 없었지만, '이미 아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왜 그렇게 유독 '가르침'을 못 견뎌 한 걸까? 그건, 어쩌면 내 역사에서 뿌리 깊은 '인정 욕구'와 긴밀한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항상 나한테 '더 잘해야지'라는 말을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있는 그대로, 그 때 최선을 다한 내 모습에 인정 받고 수용 받은 적이 없었다. 인정과 수용을 받은 적이 없으니, 나도 타인에게 내가 받지 못한 인정과 수용을 보내줄 수 없었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그야말로 '가르침'이라는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위치, 조건을 갖춘다. 그러므로 내가 (줄 수 없는) 인정을 주어야 하는 설정이 셋팅됐기에, 그 상황이 그렇게 못 견디게 싫었던 게 아닌가 짐작해 본다.


'나도 알아'라는 말도 어쩌면, 원래 타고난 성격에 더해, 인정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이미 나도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나에게 주지 않을) 당신의 인정과 수용은 필요 없다'는 원망 내지는 포기한 마음. 애초에 인정과 수용을 못 받을 것을 알고 있으니, '나도 이미 안다'는 말로 상대에게 쌀 한 톨만큼의 빈틈도 주지 않는 것이다.


다 쓰고 나니, 그냥 짜증나서 그런 게 아닐까, 라는 말로 이미 썼던 마음들을 그냥 모두 뭉개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어쩌나 저쩌나 확실한 건, 살아가면서 이 '인정'에 대한 결핍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는 점이다. 나 스스로한테 충분한 인정과 사랑을 주고, 타인에게도 관대한 인정과 사랑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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