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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MENT
By Harugraphy . Aug 10. 2017

명재고택∙明齋古宅 / 여름∙夏

MYEONGJAE HISTORIC HOUSE / SUMMER


17.08.06


좋은 음악은 좋은 사진을 만든다.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면 컷마다 담기는 감정이 풍부해져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예전에 TV 예능 프로를 보다 우연히 들은 음악이 내가 찍는 사진들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 곡을 오랫동안 애타게 찾았다. 다음 애플리케이션으로 음악 검색을 하고 싶었지만 TV를 그렇게 많이 보는 편이 아니라서 아쉽게도 그 이후로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그 음악을 다시 듣게 되었다.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만큼은 세상의 전부였던 첫사랑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의 느낌이 그럴까. 그녀의 이름은 '꽃날'이었다. 찾아보니 2006년 10월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황진이' OST에 수록된 곡이었다. 10년도 더 된 드라마의 음악이었다니, 쉽게 마주치지 못할 만도 했다. 이쯤 되면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이번 명재고택을 촬영하는 내내 '꽃날'을 들었다.    


태어난 지 3개월 된 은실이, 선한 눈망울이 자꾸 떠오른다


고택에는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 생후 3개월 된 진도견 '은실이'다. 암컷 백구인데 참 예쁘고 순하게 생겼다. 잠깐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니 그새 내 운동화 한 짝을 물고 멀찌감치 가 있었다. 운동화를 발밑에 두고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미안한데 좀 놀아 주지 않을래?'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갖고 놀 장난감이라고는 수건 한 장밖에 없으니 심심할 만도 하지. 사진을 찍을 때 졸졸 쫓아다니며 운동화 끈을 물고 늘어지는 게 싫지 않아 내치지 않았다. 강아지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고택의 풍경이 한층 정겹고 생기가 돈다.


허벅지가 가려운지 깨무는 은실이. 긁어 주니 좋아하는 눈치였다


주방 근처에서 서성이는 은실이


다리를 꼬았다. 암컷이라 그런지 강아지인데도 선이 여리고 곱다


나 지금 심심하다고


아직 계단이 조금 높을 나이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하게 다가올 때



고택 주변의 배롱나무는 작년보다 더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장독가 배롱나무 밑에서 마주친 작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짙은 밤색의 장독 뚜껑을 피륙 삼아 옆에 있는 커다란 배롱나무가 간밤에 곱게 수를 놓았다. 금빛 꽃가루는 여름 밤하늘에 뿌려진 별처럼 반짝이고 두 가지 색의 꽃잎은 꼭 알맞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 여기 보라고 슬쩍 내놓은 예술 작품이었다. 무심코 지나칠 만한 곳에 숨겨져 있던 작은 보석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이란! 숨을 죽이고 혼자서 그 오밀조밀한 순간을 읽으며 잠시나마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값비싼 수입 꽃을 파는 플라워숍도 아닌 앞마당 장독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으니 이곳에서의 일상은 도시보다 풍요롭다.


솜사탕이 열리는 나무로 가득한 숲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눈이 달다


작년에는 꽃이 많이 피지 않았던 장독가의 배롱나무


아름다움이란 것이 폭발한다


이번 여름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보고 또 보고, 가까이에서 보고, 멀리서도 보고




고택 근처의 촬영을 마치고 종학당으로 장소를 옮기려고 하자 윤완식 선생님께서 종학당 맞은편에 있는 유봉영당에 들러 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명재고택에 자주 왔지만 근처의 파평 윤씨 가문과 관련된 다른 유적지들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순간 후회가 되었다. 유봉영당은 윤증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윤증(1629~1714)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행실이 뛰어나 여러 번 벼슬길에 오를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 40세에는 충남 논산으로 내려와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과 성리학 연구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죽은 뒤에 선생이 가르치던 유생들이 영조 20년(1744)에 이곳 유봉영당과 경승제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했다.


멋진 기세를 뽐내는 향나무


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왼편으로 거대한 향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계절마다 찾아왔으면서도 이런 멋진 나무를 보지 않고 그냥 갔었다니. 유봉영당 바로 아래에 자리잡은 주택에 살고 계신 주민분이 창문 너머로 수령이 삼백 년 정도 된 나무라고 웃으며 자랑을 하신다. 밑동부터 회오리치듯이 휘말려 올라간 나무의 몸통이 정말 볼만하다. 수령이 오래되고 나무의 방향이 담장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받침목을 해 주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안쪽 문으로 들어가면 담장 옆에 멋진 배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담장 기와 위로 떨어진 배롱나무 꽃잎이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은 더없이 예뻤다. 그렇게 빛나는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옆의 출입문으로 대략적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수술 자국이 남아 있다.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길


여름 하늘을 배경으로 한 장 찍었다


열려진 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


수수한 흙담을 배경으로 하니 화사한 배롱나무 꽃이 좋은 포인트가 된다




기와 위로 떨어져 있던 배롱나무 꽃잎이 반짝인다



정면에서 바라본 유봉영당


유봉영당을 둘러보고 종학당에 도착하니 시간이 10시가 다 되었다. 시계를 보니 기온은 이미 35도를 넘어섰다. 사실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안 되는 날씨였다. 그렇지만 종학당 숙사 주변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배롱나무 꽃을 보니 도저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결국 뙤약볕 아래서 한 시간 정도 사진을 더 찍었다. 좀 생뚱맞은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무더운 여름날 정신없이 촬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고 땀 흘리며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사진이란 영원하고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다가 그중 내 마음에 드는 찰나의 순간을 몰래 훔쳐오는 일종의 도둑질이다. 지금이야 젊고 건강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이런 도둑질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종학당 숙사 근처의 배롱나무, 벌이 엄청 많았다


숙사 뒤편의 굴뚝 주변에도 배롱나무가 많다



숙사 안쪽에서 바라본 왼편의 배롱나무


숙사 뒤편으로 올라가는 계단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으나 벌이 무서워 더 다가갈 수 없었다




실제로 봤을 때는 더 아름다운 풍경, 그 느낌을 잘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고택으로 돌아와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생각했다.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고택을 찾았다, 무엇이 나를 계절마다 이곳으로 이끄는 걸까. 이날의 아침 식사가 그 답을 찾는 실마리가 될 것 같다. 5시 반쯤 고택에 도착해서 세 시간 정도 사진을 찍고 윤완식 선생님 가족과 한옥스테이를 한 손님들이 다 함께 모여 아침 식사를 했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 작은 참조기 두 마리와 밑반찬 몇 가지, 그리고 구수한 배추된장국. 눈에 띄게 화려한 반찬이 없는데도 밥이 꿀맛이다.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대화가 식탁 위로 오간다. 어제 집에 들렀던 타지 손님에 대한 이야기,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 외에 가족이 같이 알고 있어야 할 정보가 이 자리에서 공유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의 '공유' 버튼을 누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고택 안쪽에서 말리고 있던 고추



새로 생긴 화분들, 소박한 아름다움이 피어난다



쉬워 보이지만 절대 쉽지 않은 풍경, 굉장히 정제된 아름다움이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마주친 웅장한 구름.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고택이 아니다. 지금도 윤증선생의 종손이 살고 있고 장독에는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장이 가득하다. 때때로 반가운 손님과 아이들이 찾아오고 강아지가 마당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닌다.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어린 시절과 시골에 대한 향수를 간질간질 자극하는 사람 냄새 나는 풍경이 다행히도 아직 이곳 명재고택에 많이 남아 있다. 어쩌면 방금 떠나온 고택은 건조한 도시 생활에 지친 내가 잠시 목을 축이고 쉬어 가는 마음속 오아시스가 아니었을까.


덧 : 원래 고택 안쪽으로는 출입이 불가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명재고택은 지금도 윤증선생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일반 가정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손님으로 초대받아서 갔기에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저도 가족분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겠다고 그냥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일부 예의없는 사람들 때문에 많이 힘들다고 하시네요. 사진을 찍기 위해 배롱나무를 흔들거나 올라타면서 훼손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져서 걱정이라고 하십니다. 예쁜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고택에 방문해 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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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유산,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문화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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