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양희 Feb 18. 2023

나도 몰래한 도둑질

책 읽어주는 남자, 실수를 모르는 여자

 1995년,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농협을 향했다. 농협은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어른 걸음으로 5분이니, 어린이의 걸음으로는 조금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태평비디오를 거쳐 태평빌라를 지나면 차들이 쌩쌩 달리는 이차선 도로를 건너 농협이 있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저축하는 습관을 길러주려 하셨나 보다. 할머니는 내 통장을 만들고 거기에 돈을 입금하기 위해 1,500원을 준비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농협으로 향했다. 그때 알던 동요 중 “땡그랑 한 푼, 땡그랑 두 푼”하며 저축을 장려하는 노래가 있었는데, 2절 노래가사 중 저축하는 어린이에게 부자라며 창구 언니가 칭찬해 준다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그 노래 속의 주인공이 될 것 같은 느낌에 뿌듯함으로 부푼 마음을 안고 할머니와 함께 길을 나섰다. 이때가 할머니랑 손을 잡고 어딘가를 가는 나의 마지막 기억 속 한 순간이다.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내 손을 잡지 않았는데 그때부터인지도 모른다.

  농협에 도착한 우리는 은행창구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통장을 만들러 왔다고 했다. 노래 가사처럼 어여쁜 언니가 저축하러 왔냐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나는 칭찬 비슷한 인사에 수줍어 할머니 뒤에 숨었다. 할머니는 나의 통장을 만들러 왔다며 준비한 1,500원을 꺼내려 손지갑을 열었다.


  순간 할머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본인이 준비한 1,500원 중 지폐만 지갑 속에 있었고, 동전 500원이 사라진 것이다. 할머니에게 500원은 큰돈이었다. 아니 큰돈이라기보다 자신의 재산이었다. 자신이 번 것에 대해서는 크든 작든 절대로 손해를 봐서는 안 되는 인물이 바로 우리 할머니다. 어린 시절부터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시집와서도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떡 장사를 하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할머니에게 500원은 절대로 사소한 돈일 수 없었다.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500원에 할머니는 어쩔 줄 몰라 발을 굴렀다. 그때 창구 언니가 말했다.

  “혹시 오시던 길에 흘렸거나, 집에서 안 챙겨 오셨을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보시고 오시겠어요?”

  “아이고, 알겠습니다.”


  할머니는 수중에 가지고 있던 1,000원을 저금하지 않은 채 도로 넣고, 나를 데리고 큰길을 건너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가 내 손을 잡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는 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에게도 떨어진 500원이 있는지 찾아보라 말씀하셨다. 그러던 중 한 번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그곳에 500원이 있었던 거다. 할머니의 손지갑이 아닌 주머니에 말이다.

  나는 안도했다. 500원이 없어진 게 아니고, 할머니가 가지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다시 창구에 가서 저축을 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다시 농협으로 발걸음을 돌린 우리는 창구언니 앞에 도착했다.

  “500원 찾으셨어요?”

  언니의 물음에 대한 할머니의 대답이 27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한 이유는 그때 받은 충격과 사람에 대한 실망,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너무 컸고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글쎄, 야가 가져갔더라고.”


  나는 순식간에 꼬마 도둑이 되었다. 500원을 할머니로부터 감췄다가 들통 나서 잡혀온 도둑. 할머니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둑으로 몰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어린이의 무력감. 뭔가를 잘못한 사람이 된 듯한 수치심. 할머니가 거짓말을 한 사실에 대한 충격과 실망. 이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나는 그곳에 서있었다.

  “아, 그랬구나.”

  창구언니는 별말 없이 통장을 발급해 주었고, 나의 통장에는 1,500원이 찍혔다. 칭찬받는 저축하는 어린이가 아닌 발칙한 도둑이 되어 서있는 내가 너무 창피했다. 분했다. 그 분한 마음 한 조각이 할머니를 싫어하게 된 마음의 첫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내가 어렸기 때문에 본인의 실수를 나의 잘못으로 넘겨도 될 거라 생각했나 보다. 어린애는 잘못을 해도 사람들이 용서해 줄 수 있으니까. 어린애는 어차피 잘 기억하지 못할 테니. 하지만 그 어린애는 서른다섯이 된 지금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그때의 수치심을 생생히 기억한다. 할머니가 그때 내가 500원을 가져간 사람이라고 말한 진정한 속마음은 무엇일까?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영화가 있다. 여주인공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하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상부에서 시키는 모든 작업에 서명을 했다. 작업 지시서에는 유대인을 죽이기 위해 그들을 벌거벗긴 채 가스실로 밀어 넣고 가스를 틀라는 내용이 있었고, 한나는 어떤 내용인지 모른 채 모든 작업을 수행하겠다 서명하고 그 일을 직접 처리한다. 훗날 전범 재판장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더 수치스러워 자신의 작업 수행내용을 인정하고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지내게 된다. 자신이 글을 읽지 못해서, 그 내용을 알지 못해서 서명하고 작업을 수행했다는 진실을 말하면 형량을 감면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왜 그를 인정하지 못했을까? 글을 읽지 못한다는 약점이 드러나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적 자아의 모습이 깨지기 때문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도 그런 본인의 이상적 자아를 지키기 위해 나를 희생시킨 게 아닐까? 실수를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 500원을 주머니에 두고 못 찾아서 다시 돌아간 나이 든 여자가 아니라 앙큼한 손녀가 돈을 가져가서 잠시 속은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한나가 이상적 자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대신해 기꺼이 감옥을 선택한 것처럼, 우리 할머니는 나를 기꺼이 도둑으로 만든 게 아닐까?


  하지만 할머니는 본인의 자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어렸던 내 자아를 무너뜨린 것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오은영 박사님이 당시에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에 대한 내 마음은 부서진 채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다. 그녀의 행동을 분석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지금에 와서야 조금은 치유되고 있지만 이제 할머니는 그런 내 설명을 이해하기에 너무 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