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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혁선율 Jul 04. 2019

한밤중 책장 넘기는 소리

꿈나라 대신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초등학교 3학년 호야는 요즘 체력이 좋아졌는지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 원래 9시 반이면 네 아이 모두 잠이 들곤 했다.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난 뒤 2시간 정도 나만의 꿀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 패턴이 조금 달라졌다. 호야의 등장으로...


호야는 또래보다 키가 좀 작다. 성장호르몬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시간에 깊게 잠들도록 하기 위해 일찍 재우려고 노력했다. 빼꼼히 문을 열고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호야. 예전 같았으면 억지로 잠을 재웠을 것이다. 하지만 말똥말똥한 큰 눈을 보니 잔소리가 쏙 들어갔다. 더구나 알아서 책을 들고 거실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나도 내 책상에 앉았다.


책을 읽다가 문득 귀를 기울였다. 고요한 정적 가운데  '솨악 솩솩' 규칙적인 소리가 듣기 좋다. 책장 넘기는 소리마다 궁금증이 생긴다. 무슨 내용일까, 호야는 무슨 생각을 할까? 느낀 점들이 뭘까.




결혼할 때 사촌언니가 TV를 사준다고 하는 걸 마다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TV를 장만하지 않고 10년이 지났다. 가끔 큰 화면으로 드라마나 뉴스를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이후에 큰돈을 쓰기도 쉽지 않았고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얼마든지 다른 기기로 볼 수 있어서 구입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그때 그 결정이 잘한 것임을 깨달았다. 저녁 밤 시간 가족끼리 뒹굴며 놀다가 책 읽고 잠든다. 너무 당연한 루틴이 되고 있다. TV가 있었다면 TV 소리가 한 자리 차지했을 것이다. 그 소리 대신 정적 자체도 좋고 그 가운데 종이 넘어가는 소리도 좋다.




매달 2만 원에 20권의 책을 빌려주는 책 대여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다. 수준에 맞는 책을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선별해준다. 도서관에 가면 읽고 싶은 책들이 대부분 대출 상태였고 한참 육아 중일 때는 도서관 가기 어려워서 대여를 시작했는데 만족도가 아주 높다. 나와 남편이 아이들에게 읽어주다가 책내용에 같이 감동받을 때도 많았다. 그리고 동생들도 같이 볼 수 있고 한 달 내에는 꼭 다 읽게 되니 비용을 들인 만큼 성과가 있는 것 같다.


아직 다 읽지 못한 대여 책 대여섯 권을 끌어안고 소파에 누워 하나씩 읽는 호야. 사실 그날 자기 전에 반납 기간이 다 되어가는데 읽지 않은 책들을 보며 폭풍 잔소리를 하려다 말았다. 참길 잘했다.

 

한밤중 책장 넘기는 소리의 조연들.


경남독서한마당 선정 도서로 학교에서 먼저 독서대회를 한다고 했다. 빌려온 책이 너무 두껍다며 투덜거리던 호야에게 3일 동안 세 번씩 나눠서 읽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그 책을 꺼내 들고는 침대 스탠드 밑에서 다 읽어버렸다. 이제 독후감을 쓰든지 독후 그림을 그리든지 결정하고 미리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호야는 당연 독후 그림이다. 책에 나온 그림을 그대로 그리면 안 되고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해야 한다. 호야는 너무 긴 책 이야기 중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연해했다.


"느낀 점이 뭐야?"

"엄마의 소중함?"

 "엄마가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언제였어?"

"생각이 안 나, 엄마가 도와줘"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독서대회하기 전까지 계속 고민해봐"


호야는 등교하기 전까지 신발을 신으면서도 중얼거렸다. 엄마가 도와줘야 한다고. 과연 오늘 독후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일주일 한 권씩 독후감 쓰는 숙제를 제일 어려워하는 호야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막연했다. 엄마인 내가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에도 관심이 많지만 막상 아이에게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느낀 부분을 적도록 지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급한 마음에 초등 글쓰기 관련 책을 몇 권 빌렸다.


남편은 책 읽기 자체를 즐거워해야지 독후감을 쓰기 위해 책을 읽게 하거나 책 읽고 억지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독후감을 쓰도록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도 아이가 읽는 책을 같이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면 되지 않냐는 지인의 조언에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던 중 아는 분이 Why 시리즈와 과학 동화책들을 주었다. 다른 아이들은 1학년 때부터 읽기 시작하던  Why 시리즈를 호야는 만화책임에도 글밥이 많아 읽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Why책들을 그대로 반납하면서 약간 서운했다. 그런데 지금은 코를 박고 Why 시리즈를 읽느라 정신없다. 최근까지만 해도 그림책을 더 선호했고 글밥이 많고 두꺼운 책은 부담스러워했다. 언제쯤 두께가 있는 책을 읽을련지 약간 걱정했는데 그건 정말 기우였다.




꿀 같은 나의 시간에 책동무로 등장한 호야는 그때부터 긴 내용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수월하게 책장을 넘기며 다채로운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다. 나도 호야의 책장 넘기는 소리를 벗 삼아 더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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