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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혜 Jan 20. 2021

[일기] 이렇게 자꾸 조금씩

그저께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신트림이 올라오고 목이 따가웠다. 뱃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몸을 싸매고 걸었다. 그 어떤 말도 나를 움직이게 하지 못한 겨울이지만, 걷고 또 걸으면 나쁜 운이 좋아질 수 있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었다. 그러나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자꾸 헛구역질이 나왔다. 밤새 자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천장을 봤다.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용맹이가 여느 때처럼 울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시트가 흠뻑 젖어 있었다. 침대와 등 사이로 바람이 들었다. 반쯤 눈을 감고 습식캔을 열어 밥그릇에 부어준 후, 강아지 풀을 흔들었다. 용맹이가 기다렸다는 듯 강아지 풀에 달려들었다. 식은땀이 줄줄 났지만 장난감을 흔들었다. 용맹이가 배를 까뒤집으며 갸르릉 울었다.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는데, 바닥에 기절한 채로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오후 한 시였다. 당장 강의를 하러 가야 하는데 머리가 띵했다. 제 때 안 먹고, 제 때 자지 못했더니 몸이 축났다.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찍혀 있었다. 친구였다.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너도 전화받았지, 라는 메신저의 단어를 보며 축하한다는 말이 기계처럼 나왔다. 동시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제산제를 털어 먹고 끙끙 앓으며 메일을 열었다. 스팸메일함이며 업무 메일함에 이런저런 일거리가 쌓여있었다. 메일함을 닫고 다시 천장을 보다 울었다.


다섯 번째 고배다.

소설 열 편을 쓰고 접었다. 평론도 그래야만 할까.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꾸만 커가는데 나는 자꾸 작아진다.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일을 내가 선택해서 했고, 일부러 힘든 길을 갔다. 내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만 남겨두고 모두가 자꾸 앞으로 나아간다. 순전히 내 탓이라 이제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다.



아까 나는 쥐새끼 한 마리 없는 종암동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 자꾸 토할 것 같아서 중간에 내렸다. 내리고 보니 종암동이었다. 택시도 탈 수 없었다. 찬바람을 맞고 서서 가장 오래된 문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볼모에게 연락했다. 내가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다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자 볼모가 대답했다.


[김볼모★] [오후 6:53] 고군분투한 역사가 있으면 잘 됐을 때

[김볼모★] [오후 6:53] 더 강해 보이잖아

[김볼모★] [오후 6:53] 실제로 강하고

[김볼모★] [오후 6:53] 그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일단 생각해봐


길거리에서 쪼그리고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놓친 택시들이 마구 지나갔다.

운의 탓을 하고 싶은, 미신이라도 기대고 싶어 지는 날들이다.


딱 일 년만 더, 아니면 여기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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