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이 Jan 29. 2017

26년 전 유화를 꺼내어 놓고

유화 일러스트, 회화








일러스트를 그리며 해도 해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에 기권표를 던지며, 그림을 새로이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1991년도 그때의 화구 가방을 열어 주섬 주섬 추억을 되새겨 봅니다.

남편의 공방에서 그냥 나무 인척 몸을 똬리고 산 세월이 몇 해더냐. 잘도 견디었구나.



마지막 십 대 시절 화구 가방을 들고 참으로 예쁘게 신촌 거리를 방방 거리며 뛰어다녔던 너의 주인은 이리도 색이 바래었건만 말라버려 박제가 된듯한 너는 세월이 무색게 아직도 곱디곱기만 하구나.



그제나 지금이나 선생님 말씀을 안 듣는 학생, 사라니 사는 두었던 목탄은 뜯지도 않고 사용도 하지 않았던 고집불통 소녀의 빨간 볼때기가 생각이나 헛웃음이 나온다.



물감 뒤에 선명하게 찍힌 1991년도. 그 시절 나는 꿈 많던 여고생의 끝자락에서 하고 싶은 것이 하고 싶어 몸부림치던 마지막 십 대 시절을 힘겹게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리며 더 이상 그림에 집중하지 못하고 물감이 줄어드는 것에만 조마조마해하며 물감을 마음껏 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파렛트의 남은 물감을 채 지우지도 못하고 나무상자를 서둘러 닫아버리고 도망치듯 화실을 나와버렸던 그날. 







가끔이나 그려보던 유화를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했어요. 잊고 지냈던 화구가방이 생각나서 겨우 찾아 열어보니.. 세상에나, 26년 된 유화물감이 아직도 굳지 않았네요. 뚜껑이 안 열려서 애를 먹긴 했지만 그 안에 유화들은 아직도 말랑말랑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유화 재료들을 구매하는데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유화 재료들은 모두 비싸더군요. 지금도 비싸게 느껴지는데 그 당시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그림을 그리겠다고 나섰으니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겠지요. 


지금은 뒤돌아 보니 어린 그 시절이 짠하게도 생각되지만, 오히려 그 당시에는 좌절 따위는 하지 않는 당찬 소녀였습니다. 안 되는 건 빨리 잊어버리는 아주 좋은 재주가 있었거든요. 하기는. 어쩌면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한낱 자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저 화구 가방을 26년 동안 감히 열어보지도 못하면서도 낑낑거리고 싸매고 다녔던 그 마음이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가니까요.


어찌 되었든 요즘의 저는 일러스트에서 유화로 전향하여 매일매일을 무념무상으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 시절 물감을 짜낼 때마다 느껴야 했던 재료값에 대한 압박, 그 조마조마함이 그대로 재현되어 제자신도 놀라며 참 못났다.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하고요. 제가 손도 크고 배포도 꽤나 큰 여장부인데 말이지요! 이것도 어린 시절 트라우마일까?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참 먼길을 돌아 돌아 끝내는 다시 '유화'구나 라는 신기함에 짜릿하기도 하고요. 다시는 열지 않겠다고 닫아버렸던 나만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으니 이제 저에게 대단치는 않을지라도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질 거라 기대합니다.


명절은 행복하게 보내고 계시는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tip_ 오래된 유화뚜껑이 굳어서 열리지 않을때에는 뜨거운 물에 거꾸로 잠시 담궈두면 잘 열린답니다. 그 시절 다니던 미술학원 선생님이 알려주었던 팁을 26년만에 써먹을줄은 몰랐어요. 아련 아련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시절 해녀와 수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