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5. 일, 취미, 인간관계... 그리고 점심메뉴
스물다섯 번째 글이다. 왠지 모르게 갈수록 진지한 이야기를 내려놓기가 쉽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노트북을 펴고 전날 쓴 글을 조금 보고 고치다가, 이번 글에 어떤 주제를 쓸지 생각해보았다. 약 30초 정도의 침묵이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정돈된 책장에 눈이 갔다. 좋아하는 책에 관해 써볼까? 음 … 또 한편, 노트북 옆에 놓인 물컵이 눈에 띈다. 집에 있는 컵 중 가장 좋아하는 컵이다. 흔한 유리컵이지만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다. 연한 회색 바탕에 빨간색의 작은 열매가 두 개 달린 나뭇가지 그림을 괜히 유심히 바라보았다. 산만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가끔은 이렇게 두서없이 공상을 하며 주제를 정하게 된다.
오늘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단 열 글자에 심오함이라곤 지층을 뚫는 듯하다. 마치 바칼로레아 시험에나 나올 것 같은 철학적 논의다. 하지만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떠올려봤을 때, 아무래도 생각나는 것은 점심메뉴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맛있는 점심이다. 나는 맛있는 식사 한 끼가 곧 인간을 살린다고 믿는 편이다. 이외에도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많은 것들이 있기는 하다. 일, 취미, 인간관계에서 오는 재미 같은 것들. 이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점심밥을 빼놓고서는 얘기할 수 없다.
고등학생들의 경우 등교 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의 시간표 또는 점심메뉴를 훑어보는 것이다. 내가 다닐 때는 회색 종이에 뽑아져 나온 식단표를 책상에 떡하니 붙여놓고 메인 메뉴를 형광펜으로 미리 칠해놓는 학생들이 있었다. 아니면 작게 잘라서 필통 안에 들고 다니거나 팔찌 같은 걸 만들어서 하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다. 시계는 없어도 점심메뉴는 팔에 두르고 다녔다. 직장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유일한 쉬는 시간이자 밥 먹는 시간인 점심시간은 회사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출근해서 일을 하다가 몸이 찌뿌둥하거나 집중이 안 되면 나중에 먹을 점심메뉴를 생각하며 힘을 얻기도 한다. 이후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나면 또 남은 하루를 보낼 에너지가 생긴다. 점심밥의 힘이다.
삶이 종종 의문으로 가득할 때가 있다. 몇 천 년 전부터 많은 철학자들이 연구해왔던 주제에 비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고민들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만약 모든 철학자들의 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삶은 '미지'라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미지 속에서 사는 철학자들도, 오늘의 점심메뉴는 선택할 수 있다. 그들도 밥은 먹어가면서 연구했을 테니 말이다.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 로댕의 유명한 조각상이 있다. 그가 생각하다가 굳어서 죽어버리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밥이나 먹어라'였을 것이다. 끝없는 생각과 고민에 쌓여 죽어버릴 것만 같아도 오늘은 무엇을 먹을지 생각해보는 재미를 즐기고, 나름 한 끼를 챙겨 먹으면 수많은 고민들에서 잠시 멀어지게 된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탄수화물이 필요한 생명체다! 당신은 혹시 장례식장에서 세상이 무너질 듯 눈물을 쏟다가 마지못해 입에 넣은 시락국의 맛을 아는가? 갑자기 눈물이 쏙 들어가고 몸이 살아나는 그 느낌을. 살아있다는 증거는 바로 멋진 점심식사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