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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콕과 폭풍 러닝

2025.11.15

by 이준수

어떤 사람은 벼락에 맞아 죽는다. 또 어떤 프랑스 사람은 앞마당 수영장 공사를 위해 땅을 파다가 금괴 다발을 발견한다. 세상 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인과 관계의 결과로 벌어진다. 내가 '주차 중 충격 감지' 알림을 받은 건 무릉계곡의 소나무 아래를 지나던 무렵이었다.


휴대전화로 블랙박스 화면을 확인했다. 검은 세단의 뒷좌석에서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문은 옆에 있던 내 자동차를 치고 나서야 멈췄다. 문콕이었다. 그냥 콕은 아니었다. 영상 내에서 '탁'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건 제법 센 부딪힘이다',라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앞유리에 내 전화번호가 잘 보이도록 놓아두었다. 그러나 내게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문콕을 한 두 번 당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차체에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면 모두 넘어갔다. 타인의 모든 실수를 일일이 지적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왜 이리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주차장까지는 거리가 있어 약 한 시간쯤 뒤에 현장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색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페인트 아래 검은 철판 금속 부위가 드러나 있었다. 단순한 문콕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부분 수선(혹은 페인트 땜질)이 필요해 보였다. 당연히 고의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수리에 대한 실비를 받고 싶었다. 구입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차다(구입 일주일 만에 빨간 신호등에서 뒤차가 박긴 했지만).


그러나 상대방과 연락할 길이 없었다. 가해 차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보았다. 다행히 차량의 번호판과 충격 장면, 충격 후 떠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는 연락처를 알고 싶어 112를 눌렀다. 여차저차 설명하니 사고는 아닌 것 같으니 근처 지구대까지 와 줄 수 있겠냐는 답변을 받았다. 아무래도 도시 외곽의 산이다 보니 출동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동의했다. 가해 차량도 없는 마당에 와서 무얼 더 하겠나.


차로 십 분 거리의 지구대로 갔다. 경찰관 분께 블랙박스 영상을 넘겨 드리고 전체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말씀드렸다. 그러나 대단히 안타깝게도 '문콕'은 교통사고가 아니므로 형사적 절차를 밟을 수 없고 민사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하셨다.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일단 내 자차 보험으로 수리를 하고 상대방 차량을 조회하여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결국 당한 사람이 시간을 내어 차를 고치고 비용을 선지불 하고 보험사를 통해 이런저런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나는 단지 그 사람 연락처가 알고 싶었을 뿐이고, 페인트 땜질하는 실비가 필요했을 뿐인데.


보험사에 연락을 하니 월요일쯤 담당자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 문제는 최선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서 차를 수리하고, 상대방과 연락이 닿아 실비 보상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 집에는 차가 한 대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양양까지 왕복 70km의 출퇴근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 하루도 차를 맡길 수가 없다. 그럼 수리는 어쩌지... 누군가는 문을 콱 찍고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수습은 찍힌 사람이 해야 한다.


갑자기 엄청나게 달리고 싶어졌다. 나는 해 질 녘의 망상 해변으로 갔다. 경찰 아저씨가 큰 도움 못 줘서 미안하다고 주신 오란다를 먹으면서 온 가족이 뛰었다. 파도가 규칙적으로 왔다가 밀려갔다. 서쪽의 산은 오렌지 색으로 물들었다. 기울어가는 태양의 주황색 광선이 다리를 비추었다. 긴 그림자가 모래사장에 드리워졌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달리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인간에게 다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힘차게 내딛는 걸음마다 스트레스가 0.1%씩 빠져나갔다. 문콕은 랜덤 사건이다. 우연히 그 자리, 그 순간에 어떤 모종의 이유로(힘 조절의 실패 등) 일어나는 물리적인 결과다. 수리는 어떻게든 되겠지, 연락도 어떤 식으로든 되겠지. 남은 일도 그냥 일이 흘러가는 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뛸 때는 단순하게 다음 걸음만 생각하는 게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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