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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 Apr 06. 2019

터진 와이셔츠

  한 가지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장르 불문하고 어떤 물건이 내 것이 되어가는 과정을 사랑한다. 물건이 사람의 손에 익는다는 것. 물건에 대한 익숙함은 사람에 대한 그것과는 다르다. 물건은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 사용한만큼 익숙해진다.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반려동물을 이용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라고 어디선가 읽었다. 반려동물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절대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익숙함은 편안함이다. 물건도, 사람도,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익숙해지면 계속 그것만 사용하게 된다. 요리사들은 자신의 조리도구를 가지고 다니고 프로게이머들은 자신의 키보드를 싸들고 다닌다. 인간과 도구의 관계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있어왔다. 박물관에서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돌도끼 등의 도구들을 바라보면 아련함을 넘어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닳을대로 닳아 반들거리는 손잡이를 보고 있노라면 이것 또한 그 시절 누군가에게 익숙한 도구였겠구나, 생각한다. 내가 가진, 내게 익숙한 물건들도 언젠가 이렇게 박물관에 전시될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과거와 미래는 이렇게 교차된다. 내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물건은 만년필, 수첩, 휴대폰, 지갑 따위인데 이 물건들도 후세의 후손들에게 어떠한 영감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면 지금 쓰고 있는 물건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몇 해 전 한국에 '미니멀리즘' 열풍이 불었다. 새로운 트렌드라 공부차 관련 서적을 몇권 사다가 읽었는데, 그 정의가 명확하지 않았다.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그 해석은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나름 나만의 정의를 내려보았는데 그게 바로 '반드시 필요한 것만 사자'였다. 이 단순해 보이지만 명쾌하고 간단해 보이지만 어려운 다짐은 그 후로 지금껏 내 삶을 지배했다. 이에 따르면 우선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이 제 기능을 잃기 전에는 새 물건을 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가지 물건을 오래 사용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극도로 신중하게 구매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물건을 오래 사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부분이 '물욕' 때문인데, 한달이 멀다하고 신제품이 나오는 작금의 사회에서 '물욕'만 탓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물욕'에 지배된다. 나의 미니멀리즘에서는 이같은 물욕을 이겨낼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 왜 이 물건을 샀는지. 이것을 사기로 결정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신중하게 구매한 물건일수록 마음이 덜 흔들린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한 뒤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해졌고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책임감이 더 강해졌다.

  몇 주 전 신고 다니던 구두 밑창에 구멍이 났다. 뒷굽이 닳아 교체하거나 새로 산 적은 있어도 발바닥 밑창에 구멍이 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며칠 전에는 다림질을 하다가 와이셔츠 옷깃이 터진 것을 발견했다. 전율했다. 이 부분과 내 목은 얼마나 많이 스쳤을까. 그 와이셔츠는 한 5년 입었다. 시간의 흐름이 만져졌고 이제 떠나보내야 한다니 아쉬웠다. 구멍난 구두는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들은 말 그대로 '하나밖에 없던 것들'이다. 미니멀리즘 실천 이후 새 물건을 산다는 기대감보다 지금 쓰는 물건을 얼마나 오래 쓸까, 하는 기대감이 더 커졌다. 새 물건을 사는 게 오히려 두려워졌다. 이십대 후반이 되니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것 같다. 새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알고 지내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오래 만나고 싶어졌다. 장담컨데 사람을 오래 만나는 것은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일보다 몇배는 어렵다. 요즘처럼 각자의 개성이 다양한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그런 마음을 갖게되는 것은 한 사람을 오래 만나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사람과의 우정, 사랑, 믿음 등의 가치는 정말로 아름답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오래 만나지 않았어도 우정과 사랑 등을 느끼고 더 나아가 희생과 포용이 가능하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위대하고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 터진 와이셔츠가 또한번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새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알고 지내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오래 만나고 싶어졌다.


터진 와이셔츠 옷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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