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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목 Oct 27. 2021

한국인인 내게 자꾸만 '칭챙총'이라고 인사하는 사람들

여행에서 대체로 우린 주목받는다. 한국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냥 '여행'이라서다. 낯선 곳으로 가 이방인이 되는 게 여행이고, 여행이란 곧 '이방인 또는 낯선 자가 되는 것'인 따름이다. 한국사람으 여행이 아니라 우리와 다르게 생긴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그들도 큰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내겐 그게 꼭 좋지만은 않았다. 외려 나는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게 싫었다. 특히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그랬다. 


평소처럼 여유롭게 시내 산책이나 하던 중이었다. 멀리서 한 젊은 현지인 남성이 나를 발견하곤 외쳤다. “칭챙총!" 동아시아인을 조롱하는 전형적인 말이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까닭은, 에티오피아에는 중국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중국의 자본'이 많이 들어와있기 때문.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아프리카 내 입지를 높이기 위해 중국이 사회 기반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해준단다. 하지만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시설이 제 기능도 하지 않는 게 많고 일자리도 중국인 노동자가 다 빼앗아가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그 덕에 오히려 중국에 대한 민심과 이미지는 오히려 갈수록 더 나빠지는 사정이라고. 아무튼 그래도 그 동네에선 동양인 중 중국인이 제일 흔하다 보니 동양인의 얼굴이 보이면 대체로 중국인이라 생각하고, 조롱까지 일삼는 거라고 한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칭챙총'에서 그치지 않고, 눈을 찢어가며 온갖 조롱을 제스쳐까지 해댔다. 물론 그저 똥 밟았다 생각하고 피해버렸으면 그만이다. 애초에 말이 통할 사람이었다면 저런 짓도 하지 않았을 테니, 굳이 붙잡고 떠들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 에티오피아를 여행하며 워낙 쌓인 게 많았다. 가만히 앉아 참고만 있을 순 없었고, 당장 다가가 화를 냈다. 왜 나한테 그러냐고. 내가 너한테 뭘 잘못 했냐고. 그런데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더니 그 자식은 되레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니들이 우리한테 해 준 게 뭔데 여길 와! 여긴 우리 나라니까 니네 나라로 썩 꺼져버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어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그가 너무 밉고 야속해서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여행을 와서 저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썩 꺼져버리라니. 온라인 공간에서 댓글로 들어도 가슴이 미어지는 말을 면전에 대고 들으면 정말 속이 찢어지는 듯했따. 저런 말은 한국에서도 평생 들어본 적 없었고, 특히 여행을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 듣지 않았을  거다. 괜히 여행이 후회됐고, 이럴 거면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상처가 된 건 비단 '꺼지라'는 말만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한창 여행을 다니며 인생과 세상을 배워나가는 시기였다. 200여일 넘게 여행을 하며 느낀 것 중 하나는 '결국 우리는 다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당연하다. 한국에만 있을 땐 국적이든 뭐든 사람을 구분할 줄만 알았지, 나와서 세계 곳곳을 다녀보니 모두 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고, 사람 사는 모습은 정말로 다르지 않더라. 굳이 별의 별 이유와 기준을 대며 서로를 구분할 필요는 전혀 없겠더라. 무엇보다 지금껏 아랍과 아프리카에서 이런 식의 인종차별을 적잖이 당해 보니, 그로부터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실 그들의 생각과 반대로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점점 더 굳어졌다. 그런데 그의 말은 그런 내 생각에 정면으로 반대됐고, 나는 열불이 나서 말했다. 


"피부 색이 다르다고 해도 너도 나도 똑 같은 '사람'이야. 그리고 여긴 너네 나라이기 이전에 누구나 맘껏 다닐 수 있는 모두의 지구야. 근데 왜 니가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그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현대화된 미국인은 마치 그 땅이 자기네 것인 양 하고 있지만, 실은 수백 년 전 아메리카 원주민은 무력으로 몰아내고 강탈한 땅이다. 누구한테 '내 땅이오'할 수 없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의 땅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말이 '원주민'이지, 그들 이전에 그 땅에 살던 생명은 반드시 있었다. 사람이 아니면 동물이라도. 결국 세상에 '영원한 내 것'이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때 나는 한창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땅을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던 양 말하니, 나로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말하니 그는 할 말이 없는지 혼자 궁시렁대며 저쪽으로 가버리긴 했다. 하지만 내 씁쓸함과 외로움은 달래질 방도가 없었다. 한창 인생을 공부해가고 가치관을 확립한 시기에 들어버린 그 말은, 정말 '이들과 나는 다른 게 아닐지'하고 의심하게 만들었다. 꿋꿋이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혼자 하는 여행에서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당신들과 다르지 않고 외려 '우리는 사실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데, 정작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런 내 바람이 있다면 더 이상 이렇게 이방인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좋은 쪽으로든 좋지 못한 쪽으로든, 그냥 당신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일부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 곤다르라는 도시였다. 보통 여행자들은 여행 인프라가 잘 잡힌 다운타운에 숙소를 잡고, 나도 지금껏 그래왔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오히려 여행인프라가 없거나 부족한 현지인들의 마을 깊은 곳에 짐을 풀었다.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허름한 여인숙 정도였다. 현지인들이 주로 하고 다니는 팔찌와 목걸이도 샀고, 현지의 젊은이들이 입는 옷도 새로 맞췄다. 입에는 맞지도 않으면서 그 동네 사람들이 먹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음식을 먹었고, 그들이 하듯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그들의 말도 배웠다. 목적은 오직 하나, '나도 현지인이 되겠다'는 일념이었다. 물론 나는 여기서 이방인이 맞지만,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게 싫어서 그랬다. 국적과 언어와 생김새는 다르긴 하지만, ‘사람’이라는 더 큰 틀에선 나도 이방인이 아닐 수 있으니까.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그들과 닮아지려 한들, 그럴수록 그들은 더 내게 관심을 가졌다. 가만 있을 때는 가만 있는다는 이유로 주목을 받았고, 그들의 복장을 하면 그걸 또 했다는 이유로 주목 받았다. 이를 테면 "야 얘봐라, 우리 따라 입었다" 하는 식이었다. 머문지 오래지 않아 아직 이방인의 냄새가 가시지 않은 게 문제인가 싶어, 한 일주일 정도 더 머물러도 봤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고, 나는 그 사실이 적잖이 힘들었다. 


그런 곤다르도 떠나던 날이었다. 다음 도시에 가려면 새벽 다섯 시 버스를 타야 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네 시 반에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굉장히 이른 시간이었지만 정류장엔 사람들이 많았다. 족히 백 명은 돼 보였다. 이 이른 시간에 다들 어딜 저렇게 가려는 건지. 꼭 간밤에 도시에 전쟁이라도 난듯 이상할 정도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보통 이런 경우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현지인 무리와 한 발 떨어져서 있는다. 하지만 현지화되고 싶은 동경심이 있던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워낙 어둡고 가로등 불도 약해 그들과 나를 생김새로 구분하긴 어려웠다. 잠깐이나마 그들과 동화된 것 같아 행복했다. 혹여 누군가 이방인이라고 무시해 새치기라도 할까,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내 조금씩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이백 여 개의 하얀 눈동자가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보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하거나 독특한 것, 평범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의도치 않아도 시선이 가는 것처럼, 그들은 거의 본능이나 무의식적으로 날 보고 있는 거였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시치미를 뚝 뗐다. 쳐다보건 말건 나는 당신들과 다르지 않은 척 했다. 그러자, 그들의 피로한 눈빛도 이내 거두어졌다. 복장도 그렇고 냄새도 그렇고, 나는 정말 현지인과 동화된 것 같아 혼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영어였다. 


“곧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갈 꺼야. 자빠졌다간 위험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나를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이지만 퍽 자존심이 상했다. 그건 분명 내가 이방인이기에 해주는 말일 테다. 물론 겉으론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속으론 조금 아쉬웠다.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얼마든지 '당신들처럼' 자빠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풋내기 여행자나 이방인이 아니라고. 


그렇게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5시가 되자 정류장 직원이 나왔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긴커녕 문 앞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 거드름이나 피웠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질서도 없이 막무가내로 서 있으니 줄을 설 때까지 안 열어줄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들도 이런 건 사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는 듯, 어차피 곧 문이 열릴 걸 알았기에 질서를 지키지 않았다. 도대체 버스에 빨리 타서 좋을 게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백여 명의 현지인들은 큰 상금이 걸린 마라톤의 출발 주자들처럼 경쟁적으로 보였다. 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는 순간 다들 먼저 뛰어가려고 안달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한 현지인이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외쳤다. 


그러자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처럼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 막 아우성을 쳤다. 모두들 한 손으론 날 가리키고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현지 암하라 언어로 정류장 관리자에게 막 뭐라고 소리쳤다. 나는 갑자기 벙쪘다. 그들의 눈빛은 아까처럼 의지가 없지 않았다. 결코 지지 않을 전투를 앞둔 검투사처럼 활활 타올랐다. 그러자, 정류장 관리자는 '그건 알겠다'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당장 뛰쳐 들어갈 것 같던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앞에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트며,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의 권리를 쳐다보는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어찌 해야 하나. 말로써 설명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왠지 그 사이로 들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단은 그렇게 했다. 


내가 들어가자 대문은 곧장 닫혔다. 나는 듬성듬성 서 있는 버스 기사를 찾아, 내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자, 창밖 너머로 대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제야 밀려 들어왔고, 나는 혹여 거기에 휩쓸렸다가는 큰 일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얘는 이방인이니까 먼저 들여보내 줍시다”라는 아우성이었던 것 같다.



이목 소속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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