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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23.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1-살아가기만 하는 남자(1)>



<에피소드 11-살아가기만 하는 남자>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나와 은미 씨는 안채 상담실에 늘어져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호은당은 문을 닫았다. 너무너무 더워서 손님이 없는 탓이기도 했다. 휴가라도 가고 싶었는데, 은미 씨는 이번 여름에는 호은당을 비워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대답을 했다. 덕분에 우리는 이 무더운 날씨에 그늘 아래에서 녹은 버터처럼 흐늘거리고 있다.

 이참에 사랑채에도 에어컨을 달자고 박박 우겨, 이 더운 날씨에 기사님들이 에어컨을 달아주고 계셨다. 조금 전, 시원한 둥굴레차를 한 잔씩 드리고 온 길이다.


 “은미 씨, 저녁에 콩국수 어때요?”


 “사랑합니다.”


 나는 킬킬 웃으며 데구르르 굴렀다. 바닥이 제일 시원했다. 아. 한옥의 매력이란. 에어컨은 이미 껐다. 잠시만 돌렸다가 꺼도 냉기는 오래 유지됐다. 조상님들은 정말 위대하다. 요즘 한옥의 과학에 잔뜩 매료되고 있었다.


 “다 끝났습니다!”


 워후!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이제 잘 때 시원하다! 자다 말고 일어나서 부채질할 필요도 없어!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유, 저희야 말로 감사합니다. 설치하러 왔는데 맛있는 걸 하도 얻어먹어서 죄송할 지경입니다.”


 “이 더위에 고생하시는데 더 해드려야죠!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는 땀에 흠뻑 젖은 두 사람에게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덕분에 살았어요. 이제 잠 좀 잘 수 있겠어요. 설치 기사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곧장 사랑채로 들어갔다.

 으아~ 시원하다! 상쾌하고 시원하고 최고다! 이제 여기서만 놀 거다. 상담실에서 죽치고 있느라 눈치 안 봐도 되고. 아싸.

 나는 은미 씨를 데리고 사랑채로 왔다. 은미 씨도 시원한 사랑채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래. 아무리 조상님들의 지혜가 뛰어나다 해도, 그때의 여름과 지금의 여름은 다르잖아요. 요즘의 혹독한 더위는 한옥의 힘으로 커버할 수준을 넘어섰다. 이젠 에어컨이 필수다.


 은미 씨의 괴상한 마수걸이 논리로, 저녁 식사는 사랑채의 내 방에서 먹기로 했다. 뭐, 이렇게 마수걸이해야 한다나. 저 고집을 누가 이겨? 나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 주방에도 에어컨 있으면 좋겠는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내 방이 시원해지니 이제 다른 곳들이 탐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참자. 사랑채만 허락받은 거니까. 여긴 에어컨 사면서 사은품으로 받은 선풍기나 가져다 놔야겠다. 그것만으로도 시원할 것 같긴 하다.

 미리 콩물을 만들고 냉장고에 넣어둔 뒤, 마당의 절반을 가린 타프에 손 볼 곳이 있나 살피는데 누군가 대문을 콩콩 두드렸다. 처음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저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대문 틈 사이에서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얼른 사다리에서 내려와 대문을 열었다. 어... 우린 무료 급식소나 자선 사업소가 아닌데...

 꼬질꼬질한, 머리도 덥수룩하고 옷도 지저분한 학생, 아니 청년이 서 있었다. 고등학생은 아닌 것 같고... 스물두셋 즈음은 되어 보이는데... 나도 모르게 그 남자를 훑다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나는 얼른 사과했다. 귀족 나부랭이들이 하던 그 기분 더러운 짓을 내가 하고 만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무슨 일이십니까? 환자는 예약으로만 받고 있는데요...”


 “저는 환자는 아닌데요... 이거...”


 부러지고 더러운 손톱을 부끄러운지 숨겨가며, 남자는 명함을 내밀었다. 이거, 은미 씨 명함인데...?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명함을 돌려주었다.


 “그... 저희 약사님이 맞으신데, 진맥을 보시거나 약을 받으시려면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환자가 아니라... 죄송한데 안에서 설명드려도 될까요?”


 남자는 불안한 얼굴을 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문을 열어 주었다. 남자는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우선 그늘진 곳에 그를 앉히고 시원한 보리차를 내주었다. 음... 뭔가 먹을 걸 좀 줘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우선 화장실을 가리키며 세수라도 하라고 했다. 땀을 굉장히 많이 흘리고 있었다. 괜찮다던 남자는 내가 억지로 밀어 넣고 나서야 씻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이 수박 세 조각과 한과 몇 개를 담아 차려 주었다. 환자든 아니든, 일단 호은당에 온 이상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허겁지겁 수박과 과자를 먹어치웠다. 처음엔 조심스러웠지만 허기가 많이 졌는지, 나중엔 정말 체할까 봐 겁이 날 정도로 먹었다. 나는 얼른 수박 몇 개를 더 썰고, 어제 만들어 먹고 남은 약식을 잘라 주었다. 얘, 얼마나 굶은 거냐...

 은미 씨가 며칠 전에 약재 사러 다녀오더니, 이런 애를 구제하고 왔구나. 자선사업을 하세요, 그냥. 요새는 귀족 나부랭이도 잘 안 오는데.

 나는 멀거니 서서 잘 먹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씻고 나오니 사람 같네. 그 사이 은미 씨가 나왔다. 아니, 그 과자는 숨겨둔 데를 어떻게 알고 꺼냈대? 와. 진짜. 곧 저녁 먹을 거라니까요! 사랑채의 내 방에 숨겨두었던 과자를 꺼내 와삭와삭 먹으며 그녀는 마당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찮다. 


 “아, 그거 이따 밤에 맥주 마실 때 먹으려고 숨겨 놓은 건데 지금 뜯으면 어떡합니까?”


 내 말에 살기 어린 눈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아차 싶지? 그거 좋아하는 거 알거든요? 그래서 숨겨놨더니만. 에이.


 “근데 그분은...?”


 과자 부스러기 묻은 입부터 닦고 우아한 척하시고요. 나는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약식을 정신없이 뜯어먹던 남자가 멈칫하며 은미 씨의 눈치를 살폈다.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은미 씨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선 이 명함이 부모님 지갑에서 나왔어요. 다른 건 다 그냥 거래처 사람들이고 그런데... 여기는 저도 처음 보는 곳이고... 전에 부모님끼리 수군거리시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서...”


 “그래요. 잘 왔어요. 음... 그... 정우 씨, 일단은 배부르게 좀 먹여 주세요.”


 그래요. 이제 노비가 거지까지 챙기는 수준이 됐군요. 조만간 대문 열고 무료 급식소 열겠네. 하. 뭔 설명이라도 해 주고 시키던가.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보증금 백만 원에 월 십만 원만 내면서도 세금 한 푼 안 내고 사는 노비인 것을.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뒤져 대충 비빔밥 한 그릇을 만들었다. 점심때 먹고 조금 남았던 미역국을 데워 함께 차려 주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다 먹어 버렸다. 수박 열 조각, 한과 세 개, 약식 한 덩이, 보리차 두 잔. 이제 비빔밥 한 그릇과 미역국까지 깨끗하게 다 비웠다. 얼마나 굶은 거야?


 “정말 맛있어요! 잘 먹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사랑채 마루에 앉은 나와 은미 씨에게 꾸벅 인사했다. 은미 씨는 그제야 남자와 마주 앉았다. 나는 말끔하게 비워진 그릇들을 치우고 은미 씨의 옆에 앉았다.


 “이따 저녁 먹어야 하니까 그만 먹고... 자, 이제 이야기해 보세요. 지난주 생일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말입니다.”


 에엥? 생일? 얘 생일이 지난주였어? 그걸 어떻게 아는데? 아는 사람이었어? 뭐야, 뭔데? 내가 당황해서 눈만 끔뻑거리는데, 앞에 앉은 남자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당황스럽고 황당하고 놀랍다는 얼굴을 한 남자는 눈을 몇 번 끔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얼른 보리차 세 잔을 담아 왔다. 분명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호은당 생활 7개월,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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