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랑 Aug 23. 2019

오늘은 내가 요리사!

엄마 같고 친구 같은 그녀에게

한동안 우리 집에는 일 년에 두 번 잔치상이 차려지곤 했다. 그 날은 바로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는 언니가 방학을 맞아 집으로 오는 날이었다. 언니는 잡채, 양념게장, 미더덕이 들어간 꽃게탕을 먹고 싶다고 했고 그럼 엄마는 여기에 갈비찜까지 추가해 준비를 했다. 언니가 오면 차려지는 잔치상은 언제나 반가웠다. 하지만 내가 진짜 반가워했던 것은 언니도 잔치상도 아닌 언니의 옷이었다.

언니가 오는 날엔 잔치상을 먹기 전 의식처럼 '도깨비질'을 했다. 집에 도착하면 언니는 짐을 풀며 언니의 옷을 하나씩 소개해줬다. 그럼 나는 하나씩 입어보며 내가 입을 수 있을만한 옷들을 선별했다. 그리고 나는 한 달간 예쁜 어른 옷으로 치장을 할 수 있었다.(당시 언니는 딱 한 달만 머물고 돌아갔기에 나는 대학생 방학이 한 달인 줄로 알았다.)

*도깨비질 : 방에 옷을 잔뜩 어질러 패션쇼를 하는 언니와 나의 행동을 부르는 엄마의 말

우리가 '도깨비질'을 하는 동안 엄마는 잔치상을 차렸다. 엄마는 언니가 자의든 타의든 간에 떨어져 사는 것을 안쓰러워했다. 그래서 집에 온 기분을 온전히 느낄 만큼의 밥상을 차렸는데 나는 그 모습에 항상 질투를 했다. '거기서도 잘만 먹고 다니는데 웬 오버야'라는 생각으로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내가 20살이 되는 시점부터는 언니와 나는 마치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많은 것을 공유했고 서로에게 의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언니는 그 지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약 6년을 나가서 살았다. 졸업하면 바로 오는 줄 알고 기다렸는데 내심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언니는 일찍 찾아온 조카 덕분에 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고 현재 우리는 한 지붕 아래에서 지지고 볶으며 함께 살고 있다.

지난해 언니네 가족이 제주 1년 살이를 해 오랜만에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퇴근길에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그 날은 내가 야구 경기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라 언니는 부러운 맘에 연락을 해왔던 것인데. 나는 사정이 생겨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혼자 치킨을 튀겨 맥주와 함께 야구 볼 준비 중이라는 언니의 에 나는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야구 같이 보자!'라는 명분으로 출발했으나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 야구는 이미 끝난 후였다. 삼겹살을 구워 먹기로 했는데 곁들여 찌개를 함께 먹고 싶었다. 평소 나는 삼겹살에 김치찌개 조합을 좋아하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보글보글 끓인 칼칼한 된장찌개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문자를 보냈는데 그녀에게 취향저격 답장이 왔다. 맛있게 끓여진 김치찌개 사진 한 장. 말하지 않아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찌개를 미리 끓여둔 언니였다.

대부분의 자식들이 엄마 음식을 먹으면 저절로 기운을 얻는다. 나 또한 그렇고.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부턴가 엄마 대신 언니 음식으로 기운을 얻은 기억이 더 많이 난다. 엄마가 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그랬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언니와 함께 맛있는 음식에 반주를 나누며 나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사실 그 날은 나에게 언니가 필요한 날이었다. 언니가 서울 집에 있었더라면 퇴근길에 언니에게 언니표 요리를 요청해 함께 잔을 기울이며 속상한 일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에 있기에 그냥 포기하던 차에 언니에게 연락이 왔고 나는 기어이 제주까지 쫓아가 음식 힐링을 하고 왔다.


오늘은 엄마 같고 친구 같은 언니와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조카의 개학날. 새삼스럽게 나에게 "고마워"를 남발했던 워킹맘 '엄니'를 위해 오늘은 내가 묵은지 김치찜을 줘야겠다. 도전!



매거진의 이전글 과일 깎기 연습을 시작해야 할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