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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 Aug 08. 2019

과일 깎기 연습을 시작해야 할 이유

한 지붕 두 가족 - 대리 효도

방학을 맞은 조카는 요즘 매일 할아버지와 함께 잔다. 평소 8시가 되면 씻고 누워 9시 안에는 잠이 든다. 방학 전에는 금, 토 주말이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자겠다며 올라와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잤다. 늦게 자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싶었다. 8시에 귀가한 엄마 아빠가 이것저것 하다 보면 10시쯤 잠자리에 드는데 따지고 보면 겨우 1시간 더 늦게 자는 것이다.

조카는 그 1시간 동안 할아버지 옆에 누워서 조용히 할아버지가 보는 9시 뉴스를 함께 본다. "할아버지 소녀상이 뭐야?", "할아버지 그럼 일본으로 놀러 가면 안 되는 거야?" 등. 그러면 아빠는 그 질문에 꽤 진지하게 답해준다. 그러면 또 이어 질문을 하기도 하며 그렇게 예순둘의 할아버지와 여덟 살 손자가 뉴스를 보며 대화를 나누다 잠에 든다.

퇴사를 하고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아빠에게 어떠한 공유도 하지 않으면서 아빠와 사이가 틀어졌다. 그냥 뭐든 못마땅하게 보는 듯한 아빠의 시선이 불쾌했다. 이에 대응하여 나도 말끝마다 짜증을 부리며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하며 피했다. 그러다 얼마 전 여름 가족여행을 갔다. 숯불 피워 고기도 굽고 술도 한 잔 하다가 엄마가 말을 꺼냈다. "외삼촌 칠순잔치에서 다들 막내딸 언제 결혼하냐고 묻더라" 이에 아빠가 덧붙여 말했다. "몰라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요즘엔 뭐 나랑 눈도 안 마주쳐"라고 했단다. 아빠가 먼저 나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화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 덕에 자연스레 내가 요즘 어떻게 사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하며 길어질 뻔한 냉전기를 마무리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 팀은 셋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시간여행을 한다.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와 탁구 대결을 하다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팀의 아버지는 이를 알아차렸고 둘은 규칙을 어겨 함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팀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돌아가고팠던 과거는 팀의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이 장면에서 오열했다.(엉엉) 아마도 뭔가 찔렸나 보다.

자식은 어릴 때 효도를 다하고 부모는 그 추억으로 평생을 산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아빠와 나는 비교적 사이좋은 부녀다. 내가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는 명백히 그랬고, 그 이후로도 많은 다툼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빠는 언제 어디에서든 나를 자랑하고 싶어 하며 사랑으로 아껴주었다. 아마도 내가 어릴 적 한 효도가 지금까지 빛을 발휘하나 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시간여행을 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 시절의 마냥 사랑스러운 딸로 돌아갈 수는 없다.

며칠 전 불 꺼진 거실에 조카가 티비 속 다큐멘터리 채널을 보며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여기서 뭐해~ 재밌어?"
"아니"
"근데 왜 보고 있어~"
"그냥 할아버지가 보니까.."
순간 말 문이 막혔다.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살며 이모가 위층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조카들의 갑작스러운 호출이 오면 나는 하던 일을 올스탑 하고 그들에게 뛰어가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나에겐 이를 뛰어넘을 감사함도 함께 한다.

매일 밤 어린 조카는 1시간 동안 가만히 할아버지 옆자리를 지키며 그냥 할아버지가 보는 티비를 함께 본다. 어떠한 생각을 해서 하는 행동은 아닐 확률이 크다. 하지만 어린 조카의 그 행동이 하루 종일 소진된 아빠의 에너지를 가득 충전해준다. 그렇게 나 대신 조카는 할아버지에게 매일매일 효도를 쏟아붓는다. 그래서 나는 그런 조카에게 고맙다.

초콜렛, 사탕보다 과일을 좋아하는 조카를 위해 오늘부터 과일 깎기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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